강대국 심리의 딜레마: '영혼'은 어디에 있는가
뉴욕타임스 사설은 미국이 이란을 둘러싼 복잡한 국제 문제에 직면하여 자국의 명성, 오랜 동맹, 혹은 국가의 '영혼' 중 하나를 잃을 수 있는 위기에 처했다고 진단했습니다. 마치 한 개인이 피할 수 없는 난관 앞에 서서 자신의 가치와 신념을 시험받는 것처럼, 국가 또한 그런 중대한 선택의 순간을 맞닥뜨린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크고 작은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때로는 그 선택이 개인의 정체성을 뒤흔들 만큼 고통스럽기도 합니다. 그런데 국가라는 거대한 집단은 어떻게 이런 '영혼'의 기로에 서게 되는 것일까요?
필자는 이 지점에서 '집단사고'라는 개념을 떠올립니다. 심리학자 어빙 재니스(Irving Janis)는 집단이 응집력을 유지하려는 압력 때문에 비판적 사고를 중단하고 비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는 현상을 '집단사고'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쿠바의 피그스만 침공 실패 사례를 분석하며, 존 F. 케네디 행정부의 고위 참모들이 반대 의견을 억누르고 만장일치로 보이는 결정을 내렸던 과정을 밝혀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우리'라는 울타리 안에서 이견을 제시하는 것을 '배신'처럼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마치 한 회사의 임원들이 모두가 내심 반대하는 프로젝트에 대해 침묵하거나 심지어 적극적으로 찬성하며, 결국 모두가 원치 않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국가의 외교 정책 결정 과정에서도 이러한 '집단사고'의 함정은 늘 도사리고 있습니다. 강대국의 리더들이 자신들의 결정이 가져올 장기적인 파급 효과나 도덕적 측면을 충분히 검토하지 못하고, 오직 단기적인 이익이나 내부의 결속만을 강조하다 보면, 결국 '영혼'을 잃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국가 간의 갈등 이면에는 '투사적 동일시'라는 심리적 역동이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정신분석학자 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in)이 제시한 '투사적 동일시'는 자신의 받아들이기 힘든 생각이나 감정을 타인에게 투사하고, 그 타인이 그 투사된 감정을 실제로 경험하고 표현하도록 유도하는 무의식적인 과정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한 아이가 자신의 내면에 있는 '분노'나 '두려움'을 직면하기 어려워할 때, 부모에게 일부러 심술궂게 굴어 부모가 실제로 화를 내도록 만듭니다. 그리고는 '역시 부모님은 나를 미워해'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무의식적 투사를 현실로 확인하는 것이지요. 국가 간의 관계에서도 이와 유사한 역동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떤 국가가 자신의 내부에 있는 '폭력성'이나 '불안정성'을 스스로 인정하기 어려울 때, 특정 상대국에 그것을 '투사'하고 그 상대국이 실제로 위협적인 행동을 하도록 유도하는 정책을 펼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국이 그 투사에 반응하여 행동하면, '저들이 역시 문제였다'고 확신하며 자신의 투사를 정당화하는 것이지요. 뉴욕타임스 사설이 언급한 '영혼'을 잃는다는 것은, 아마도 이러한 '투사적 동일시'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상대방의 본질이 아니라 우리 안의 '내 안의 괴물'을 상대에게 덧씌우고 그 환영과 싸우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도덕적 기준이나 가치를 저버리는 선택을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상대의 본질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 안의 두려움과 그림자를 그들에게 투사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비단 강대국만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삶에서도 끊임없이 던져야 할 질문입니다. 필자 또한 임상 현장에서 환자분들이 자신의 고통을 주변 사람들에게 투사하며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는 모습을 자주 목격합니다. 그 투사를 인식하고 거두어들이는 순간, 비로소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곤 합니다.
국가적 차원에서든 개인적 차원에서든, 우리는 외부의 적과 싸우기 전에 먼저 우리 내부의 '영혼'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잃으려 하는지, 그 선택의 순간에 우리의 행동이 정말로 우리의 가치를 대변하는지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 오직 외부만을 향해 칼을 겨눈다면, 우리는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선택의 기로에서 우리는 무엇을 지키려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