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시간'과의 싸움, 그 치명적인 유혹

‘아버지 시간’이라니, 참으로 멋진 표현입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지만, 우리는 종종 그 ‘아버지’를 이기려 애쓰곤 합니다. 거울 앞에서 필자 역시 부쩍 늘어난 흰머리와 깊어진 주름을 보며 한숨을 쉬는 날이 늘었습니다. 어쩌면 이 당연한 현상에 저항하려는 필자의 마음이, 저 멀리 코트 위 르브론 제임스 선수의 심리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세계 최고의 농구 선수 중 한 명인 르브론 제임스가 ‘아버지 시간’을 이기려면 은퇴해야 한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이 시대의 스포츠 영웅이 ‘시간’이라는 보편적인 한계에 직면했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그는 여전히 코트 위에서 경이로운 기량을 보여주고 있지만, 시간의 흐름은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다는 냉혹한 진실 앞에서 그의 고민은 우리에게도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우리는 언제까지 우리 자신을 ‘전성기의 나’라고 착각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착각의 뒤편에는 어떤 심리적 기제가 숨어 있는 것일까요?
필자는 오늘, 이 ‘아버지 시간’과의 싸움 속에서 우리가 겪는 심리적 현상, 특히 ‘인지 왜곡(Cognitive Distortion)’과 ‘자아 정체성(Ego Identity)의 상실’이라는 두 가지 개념을 함께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가르치기보다는, 함께 납득해 가는 과정에서 ‘아, 이게 그런 거였구나!’ 하는 순간을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먼저, ‘나는 아직 할 수 있어!’라는 외침 속에는 ‘인지 왜곡’이라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을 수 있습니다. 인지 왜곡이란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자신의 주관적인 틀에 맞춰 비합리적으로 해석하는 사고방식을 말합니다. 마치 삐뚤어진 거울을 통해 세상을 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지 치료의 선구자인 ‘아론 벡(Aaron Beck)’ 박사는 사람들이 우울증이나 불안을 겪을 때 특정 사건에 대해 자동적이고 비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갖게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예를 들어, 작은 실수 하나를 두고 “나는 완전히 실패자야!”라고 생각하는 ‘과일반화’, 혹은 모든 일이 자신 때문에 일어났다고 여기는 ‘개인화’ 등이 대표적인 인지 왜곡의 형태입니다.
르브론 제임스의 경우를 생각해 볼까요? 그는 아마도 “나는 여전히 최고다”, “나는 다른 선수들과는 다르다”, “내 몸은 아직 충분히 견딜 수 있다”와 같은 생각을 할지 모릅니다. 물론 그가 가진 능력은 압도적이지만, 노화라는 자연의 섭리 앞에서는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외일 것’이라는 믿음은 일종의 ‘선택적 추상화’나 ‘과장’ 같은 인지 왜곡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젊은 시절의 영광스러운 기억만을 붙잡고, 현재의 한계를 애써 외면하는 것이죠. 필자 역시 나이가 들면서 ‘이 정도쯤이야’ 하며 젊었을 때처럼 무리하다가 며칠을 앓아눕곤 합니다. 그때마다 ‘아, 필자도 인지 왜곡을 겪고 있구나’ 하고 피식 웃음이 나옵니다.
이런 인지 왜곡은 비단 스포츠 스타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은퇴 후에도 과거의 직함을 놓지 못하는 사람, 학창 시절의 인기에 사로잡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사람, 혹은 젊은 시절의 연애 방식을 고수하며 현재의 관계를 망치는 사람 등 우리 주변에는 ‘아버지 시간’과의 싸움에서 인지 왜곡의 덫에 걸린 이들이 많습니다. 영화 <록키 발보아>를 기억하시나요? 나이 든 록키가 젊은 챔피언과의 대결을 꿈꾸는 모습은, 현실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영광과 현재의 자아를 동일시하려는 인간의 심리를 잘 보여줍니다. 록키는 결국 승리하지 못했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을 증명하려 애썼죠. 이 모습은 어쩌면 르브론 제임스 선수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싸움과도 닮아 있을지 모릅니다.
다음으로, ‘아버지 시간’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바로 ‘자아 정체성(Ego Identity)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자아 정체성이란, 개인이 자신을 누구라고 인식하는가에 대한 총체적인 개념입니다. 이는 우리의 역할, 성취, 관계, 신념 등에 기반을 두며, 삶의 의미와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특히 운동선수들에게는 ‘농구 선수 르브론 제임스’라는 정체성이 삶의 거의 전부를 차지할 때가 많습니다. 그들의 존재 가치, 사회적 인정, 경제적 수입, 심지어 일상의 리듬까지도 이 정체성에 묶여 있죠.
심리사회적 발달 이론으로 유명한 ‘에릭 에릭슨(Erik Erikson)’은 인간의 발달 단계를 설명하며, 특히 중년기 이후에는 ‘생산성 대 침체(Generativity vs. Stagnation)’ 그리고 노년기에는 ‘자아 통합 대 절망(Ego Integrity vs. Despair)’이라는 중요한 과제를 마주한다고 말했습니다. 르브론 제임스 선수와 같이 한 분야에서 정점에 이른 사람에게 은퇴는 단순히 직업을 그만두는 것을 넘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송두리째 흔드는 경험일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농구 선수가 아니라면,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엄청난 상실감과 함께 존재론적인 불안을 야기합니다. 마치 나무가 뿌리째 뽑히는 것과 같은 고통이죠.
필자는 예전에 한 은퇴한 유명 예술가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무대에 설 수 없다는 사실에 깊은 우울감을 느끼고 있었죠. 사람들은 그를 여전히 ‘위대한 예술가’라고 불렀지만, 그는 스스로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늙은이’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삶은 무대 위에서의 찬란한 순간들로 가득했지만, 무대가 사라지자 그의 자아 정체성도 함께 흔들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아 정체성 상실이 가져오는 고통입니다. 르브론 제임스 선수 역시, 코트 위에서 내려오는 순간, 그 거대한 자아 정체성의 빈자리를 어떻게 채워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것입니다.
결국, ‘아버지 시간’을 이기려 하는 인지 왜곡은, 사실은 자아 정체성의 상실이 주는 고통과 불안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무의식적인 방어 기제일 수 있습니다. ‘나는 여전히 최고야’라고 믿어야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무게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것이죠. 하지만 이 방어는 결국 한계에 부딪히게 마련입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흐르고, 몸은 늙어가며, 세상은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버지 시간’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춤추는 법을 배워야 할지도 모릅니다. 필자는 우리가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찾아 나서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은퇴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다는 믿음 말입니다. 르브론 제임스 선수에게도,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도, ‘농구 선수’나 ‘특정 직업’이라는 좁은 정체성을 넘어, 한 인간으로서의 더 넓은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이 중요할 것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삶의 다음 장을 열어가는 가장 아름다운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진성오 박사의 자기성찰]’
필자 역시 때때로 젊은 시절의 자신을 그리워하며, 지금의 한계를 외면하곤 합니다. 하지만 거울 속의 늙어가는 필자의 모습은, 과거에 머무르기보다 현재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조용한 울림을 줍니다. ‘아버지 시간’은 우리를 꺾으려 하기보다, 오히려 우리에게 삶의 지혜와 겸허함을 가르쳐주는 스승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모두 각자의 ‘아버지 시간’ 앞에서 어떻게 춤출 것인지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여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