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마음 연구소 · my-mind.kr진성오 박사 칼럼

THE MIND GAZETTE

임상심리학자가 바라보는 오늘의 뉴스

2026년 5월 16일 토요일
발행 2026-05-16
BBC News World

디지털 사적 제재, 우리 안의 그림자

디지털 사적 제재, 우리 안의 그림자
정의는 숭고한 이름을 가졌지만, 때로 가장 추악한 얼굴로 우리를 찾아온다. 최근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한 인플루언서의 디지털 사적 제재는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인공지능으로 구현된 가상의 소녀가 한 개인의 범죄 혐의를 폭로하고, 대중은 그 심판의 과정에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다. 필자는 그 생중계와도 같은 광경을 지켜보며 서늘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정말 정의를 목격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거대한 집단적 분노의 투기장을 보고 있는 것일까. 왜 우리는 이토록 열광하는가? 법과 절차를 무시한 폭로에 왜 이리도 통쾌함을 느끼는 걸까? 아마도 그 분노의 불길 속에서 우리는 기묘한 안도감과 연대감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복잡하고 모순적인 현실 세계에서 선과 악을 단칼에 베어버리는 명쾌함, 그리고 스스로를 의심의 여지 없는 ‘선한 편’에 세울 수 있다는 유혹. 이 지점에서 필자는 스위스의 정신분석가 칼 융이 평생을 바쳐 탐구했던 ‘그림자(Shadow)’라는 개념을 떠올린다. 융에 따르면 그림자란 우리가 의식적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내 안의 어둡고 미숙하며 때로는 파괴적인 모든 속성의 총합이다. 질투, 시기, 비겁함, 잔인함과 같은 감정들을 우리는 애써 외면하며 인격의 어두운 지하실에 가둬둔다. 디지털 광장에서 벌어지는 마녀사냥은 이 그림자를 다루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우리는 ‘절대악’으로 규정된 특정인에게 내 안의 모든 어두운 그림자를 남김없이 던져버린다. 저 사람은 나와 달리 부도덕하고, 추악하며, 벌받아 마땅한 존재라고 선을 긋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향해 돌을 던지며 환호하는 ‘우리’가 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의 그림자를 정면으로 마주할 필요 없이, 오히려 그것을 단죄하는 정의로운 주체가 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의 죄가 클수록, 나의 선함은 더욱 빛나는 것처럼 느껴지는 심리적 반사 이익을 얻는다. 이러한 집단적 투사는 멜라니 클라인이 말한 ‘투사적 동일시(Projective Identification)’라는 개념으로 더욱 정교하게 설명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내 안의 나쁜 것을 남에게 던지는 ‘투사’에서 그치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대상을 내가 투사한 바로 그 모습으로 행동하도록 교묘하게 유도하고, 마침내 그와 하나가 되어 통제하려는 무의식적 방어기제다. 쉽게 말해, ‘너는 이런 나쁜 놈이지?’라고 규정한 뒤, 상대방이 정말 그런 나쁜 놈처럼 반응하게끔 몰아가고, 그 반응을 보며 ‘내 생각이 맞았어!’라고 확신하며 안도하는 과정이다. 온라인상의 좌표 찍기와 조리돌림은 이 투사적 동일시가 펼쳐지기에 최적의 무대다. 대중은 범죄 혐의자에게 ‘악마’라는 역할을 부여하고, 그의 모든 행동과 과거를 그 프레임 안에서 해석하며 분노를 쏟아붓는다. 이 과정에 동참하는 우리는 ‘악을 처단하는 정의로운 군중’과 강렬한 심리적 동일시를 이루며 짜릿한 소속감과 도덕적 우월감을 맛본다. 이것은 심리적 외주와 같다. 가장 다루기 힘든 내면의 어두운 충동을 특정 대상에게 외주를 주고, 그를 파괴함으로써 내 안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믿는 것이다. 상황이 이쯤 되면 개인의 도덕적 판단은 마비되기 시작한다. 심리학자 앨버트 반두라는 이를 ‘도덕적 탈각(Moral Disengagement)’이라 명명했다. 평범한 선인조차 특정 조건 하에서는 자신의 도덕률을 잠시 꺼둘 수 있다는 것이다. ‘정의 구현’이라는 고상한 이름으로 폭력을 포장하고(완곡한 표현), ‘다들 하는 일’이라며 책임을 분산시키며(책임의 분산), 상대를 ‘인간이 아닌 벌레’로 취급하며(비인간화) 우리는 죄책감 없이 잔인한 행동에 가담한다.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며 통찰했던 ‘악의 평범성’이 바로 이런 모습이다. 악은 괴물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다. 생각하기를 멈춘 평범한 사람들의 무비판적인 동조 속에서 거대한 악은 자라난다. 디지털 스크린 뒤에 숨어 ‘좋아요’를 누르고 악성 댓글을 다는 행위 하나하나는 사소해 보일지 몰라도, 그것이 모여 한 개인의 삶을 무참히 파괴하는 거대한 눈사태를 만든다. 그 눈사태 속에서 누구도 자신이 눈덩이를 굴린 첫 번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필자 역시 고백하건대, 때로 명백한 잘못을 저지른 이를 향한 대중의 분노가 터져 나올 때 시원함을 느낄 때가 있다. 느리고 답답한 현실의 법 체계가 해소해주지 못하는 갈증을 그들이 대신 풀어주는 것 같은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괴물을 잡기 위해 우리 스스로 괴물이 되어가는 역설을 말이다. 흑과 백의 명쾌한 논리로 세상을 재단하려는 유혹은 달콤하지만, 그 끝에는 언제나 더 큰 폭력과 왜곡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진정으로 마주해야 할 것은 저 ‘악인’의 모습이 아니라, 그의 모습에 이토록 열광하며 환호하는 우리 자신의 내면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가장 무서운 괴물은, 정의의 가면을 쓰고 우리 안에 웅크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정의감과 분노, 그 아슬아슬한 경계.
경향신문 사회

내 분노를 대신 팔아드립니다

내 분노를 대신 팔아드립니다
내 분노를 대신 팔아드립니다 누군가의 현관문에 오물을 뿌리는 ‘보복 대행’ 범죄가 또 발생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황당무계한 범죄라 여겼지만, 이내 한 가지 질문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왜 우리는 이 기이하고 불쾌한 이야기에 이토록 강렬하게 끌리는 것일까요? 단순히 자극적인 사건을 넘어, 우리 마음속 어떤 감춰진 욕망을 건드리기 때문은 아닐까요? 도대체 사람들은 왜 자신의 분노를 해소하기 위해 돈까지 지불하는 걸까요? 이 현상을 이해하는 첫 번째 열쇠는 정신분석의 아버지,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말한 ‘전치(Displacement)’라는 방어기제에 있습니다. 말 그대로 감정의 위치를 옮기는 것이죠. 가령, 직장 상사에게 받은 모욕감을 집에 와서 배우자나 자녀에게 퍼붓는 행동이 대표적입니다. 강하고 위협적인 대상에게는 표출하지 못하는 분노를,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만만한 대상에게 옮겨 폭발시키는 무의식적 자기보호입니다. ‘보복 대행’ 서비스는 이 ‘전치’를 현대 자본주의 방식으로 정교하게 상품화한 것입니다. 내 분노를 대신 받아줄 익명의 대리인, 즉 가장 안전하고 완벽하게 통제 가능한 ‘만만한 대상’을 돈으로 사는 셈입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단순히 만만한 대상을 찾는 것을 넘어, 이 행위에는 더 깊은 심리적 함정이 있습니다. 프로이트의 딸이자 저명한 심리학자인 안나 프로이트가 체계화한 ‘투사(Projection)’의 개념을 빌려와야 합니다. 투사란, 내가 받아들이기 힘든 나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마치 다른 사람의 것인 양 떠넘기는 방어기제입니다. ‘내가 저 사람을 죽도록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은 죽도록 미워해도 쌀 만큼 끔찍한 인간’이라고 여기는 식이죠. 보복 대행을 의뢰하는 마음의 이면에는, 자신의 파괴적인 분노를 정당화하려는 이 ‘투사’의 기제가 강력하게 작동합니다. 대리인을 통해 복수를 실행함으로써 ‘나는 직접 손을 더럽히지 않은 깨끗한 사람’이라는 자기기만까지 가능해집니다. 분노의 책임은 대행업자에게, 복수의 명분은 상대방의 악행에게 떠넘긴 채 자신은 완벽한 피해자의 자리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이한 서비스가 파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바로 ‘카타르시스(Catharsis)’라는 이름의 환상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을 보며 관객들이 공포와 연민의 감정을 통해 마음의 정화를 경험한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보복 대행’은 응어리진 감정을 배설하고 후련함을 느끼게 해줄 것이라는 달콤한 약속을 건넵니다. 마치 막힌 하수구를 뚫어주는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이는 진짜 카타르시스가 아닌, ‘유사 카타르시스’에 불과합니다. 감정을 다루는 과정을 ‘슬로우 푸드’에 비유한다면, 이는 인스턴트 ‘감정 패스트푸드’와 같습니다. 즉각적인 만족감은 주지만, 영혼의 건강은 오히려 해칩니다. 진정한 카타르시스는 감정의 해소뿐만 아니라 통찰과 성찰을 동반해야 하지만, 이런 ‘감정의 아웃소싱’은 그 모든 과정을 생략해버립니다. 결국 내 안에서 들끓는 분노의 진짜 원인, 그로 인해 상처받은 내면을 마주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마치 역사 속 결투에서 자신의 명예를 걸고 직접 칼을 드는 대신, 돈으로 고용한 용병을 내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승리하더라도 그 영광은 내 것이 아니며, 패배하더라도 그 교훈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저는 오늘, 역설적인 경고를 하고자 합니다. 당신의 분노를 기꺼이 외주화하십시오. 돈으로 대리인을 사서 당신의 손을 더럽히지 마십시오. 그렇게 깔끔하고 세련되게 복수를 끝냈다고 믿으십시오. 하지만 부디 이것 하나만은 기억해주십시오. 주인에게 외면당한 감정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무의식 속에 가장 추하고 끈질긴 채권자로 남아, 언젠가 반드시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당신의 삶에 이자를 청구하러 돌아올 것입니다.
그 감정의 진짜 주인은 누구입니까?
한겨레 전체

나는 '꼰대'가 아니고, 당신은 '요즘 애'가 아니다

나는 '꼰대'가 아니고, 당신은 '요즘 애'가 아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만날 때, 그 사람을 빠르게 파악하고 싶어 합니다. 뇌는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고정관념(Stereotype)’이라는 지름길을 택하죠. ‘요즘 애들’은 버릇없고, ‘꼰대’는 말이 안 통한다는 식의 딱지를 붙이면 참 편합니다. 상대를 복잡한 개인이 아닌 단순한 집단의 일부로 취급하며 모든 걸 안다고 착각하게 되니까요. 심리학에선 이를 ‘내집단(in-group)’과 ‘외집단(out-group)’의 형성으로 봅니다. ‘우리’는 선하고 합리적이며, ‘저들’은 이상하고 틀렸다고 믿게 되죠. 이런 낙인은 한 사람의 고유한 생각과 감정, 즉 ‘퀄리아(Qualia)’를 박탈합니다. 그저 ‘꼰대’일 뿐인 사람에게 공감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은 사치가 되죠. 하지만 기억해야 합니다. 당신 역시 누군가에게는 ‘외집단’의 일원일 뿐이라는 사실을요.
그 사람의 이름 대신, 당신은 무엇을 보고 있나요?
경향신문 사회

시끄러운 세상, 혹시 내 마음의 소음은 아닌가요?

시끄러운 세상, 혹시 내 마음의 소음은 아닌가요?
아이들 뛰노는 소리가 시끄럽다며 민원을 넣는 세상입니다. 공동체의 즐거운 소음이 어쩌다 ‘악성 민원’의 대상이 되었을까요? 심리학에서는 개인이 불편함을 견디는 정도를 ‘역치(threshold)’라고 부릅니다. 이 역치는 사람마다, 그리고 상황마다 달라지지요. 요즘 우리 사회는 이 역치가 전반적으로 낮아진 듯 보입니다. 각박한 현실 속에서 스트레스와 불안이 마음속에 가득 차 있으면, 아주 작은 외부 자극도 큰 소음처럼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어쩌면 진짜 문제는 운동회의 함성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마음을 채운 소음일지 모릅니다. 타인을 향한 예민함은 종종 나 자신을 향한 비명과 같거든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소음으로 여기게 된 사회, 우리는 그 속에서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는 걸까요?
아이들의 함성, 당신에겐 무엇으로 들리나요?
경향신문 사회

한순간의 실수,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는 불안

한순간의 실수,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는 불안
유리창을 깨고 수영장으로 돌진한 자동차. 영화 같은 장면에 가슴을 쓸어내리셨을 겁니다. 이런 뉴스를 볼 때 우리는 운전자를 비난하기보다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막연한 공포를 느낍니다. 이는 우리가 가진 ‘통제감의 착각’이 깨지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운전대를 잡고, 길을 걸으며 자신의 삶을 완벽히 통제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아주 사소한 ‘인지 오류’ 하나만으로도 모든 것이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이런 사건이 상기시켜 주지요. 이 불안감 때문에 사람들은 ‘나는 저 운전자와 달라’라며 심리적 ‘거리두기’를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공포의 본질은 같습니다.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연약한 기반 위에 서 있는지에 대한 실존적 불안인 셈이죠.
당신은 오늘 하루를 얼마나 '통제'하고 있나요?
한겨레 사회

'우리'라는 이름으로 베푸는 마음, 팬덤의 심리학

'우리'라는 이름으로 베푸는 마음, 팬덤의 심리학
좋아하는 스타가 내 이름으로 좋은 일을 해준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팬덤 문화는 단순히 누군가를 동경하는 것을 넘어섭니다. 스타와 팬이 ‘우리’라는 ‘집단 정체성’을 공유하는 현상이죠. 이번 기부는 그 정체성을 아주 건강하게 확인시켜 준 사례입니다. 팬들은 기부라는 선한 행동에 자신의 이름이 더해지면서, 마치 자신이 직접 참여한 듯한 ‘대리 만족’과 ‘자기 효능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는 스타와 나를 동일시하며 긍정적 자아상을 강화하는, 아주 건강한 ‘동일시’ 방어기제입니다. ‘내가 누군가의 팬’이라는 사실이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준다고 느끼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선한 영향력의 힘 아닐까요. 우리는 모두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어 하는 존재이니까요.
당신은 누구와 '우리'가 될 때 가장 행복한가요?
경향신문 사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협상, '마음'을 얻는 일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협상, '마음'을 얻는 일
거대한 조직의 노사 갈등, 남의 일 같지만 사실 우리 모두의 관계 문제와 닮아 있습니다. 모든 관계의 기본은 ‘신뢰’입니다. 이 신뢰가 한번 깨지면, 대화는 소통이 아니라 상대를 이기기 위한 전쟁이 되곤 하죠. 각자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정보만 찾고 상대의 말은 들으려 하지 않는 ‘확증 편향’에 빠지기 쉽습니다. 노사 갈등의 핵심은 단순히 임금 몇 퍼센트의 문제가 아닐 때가 많습니다. 그 이면에는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달라’, ‘우리를 존중해달라’는 ‘인정 욕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돈 이전에 마음의 문제라는 것이죠. 결국 협상 테이블에서 오가는 수많은 말들은 무너진 신뢰를 다시 쌓고, 서로가 동등한 파트너임을 확인하려는 힘겨운 과정일지 모릅니다.
당신의 가장 힘든 협상은 무엇이었나요?
BBC News World

덮어둔 과거의 악, 왜 우리는 다시 들춰보는 걸까

덮어둔 과거의 악, 왜 우리는 다시 들춰보는 걸까
수십 년이 지난 과거, 그것도 끔찍한 악인의 기록을 왜 다시 들춰보는 걸까요? 불편하고 고통스러운데 말입니다. 이는 개인이나 사회나 마찬가지로, 해결되지 않은 트라우마를 외면하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덮어둔 상처는 사라지는 게 아니라, 예상치 못한 순간에 곪아 터지기 마련이죠. 멩겔레 같은 인물을 다시 마주하는 것은 ‘악의 평범성’을 확인하는 괴로운 과정입니다. 그가 특별한 악마라서가 아니라, 평범한 인간이 어떻게 그토록 끔찍한 악을 저지를 수 있었는지 이해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인 셈이죠. 이는 고통스러운 ‘애도 작업’과 같습니다. 과거를 제대로 직시하고 애도해야만, 우리는 비로소 그 어두운 그림자로부터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당신이 애써 외면하고 있는 과거는 무엇인가요?
BBC News World

끝나지 않는 비극, 상처는 어떻게 대물림되는가

끝나지 않는 비극, 상처는 어떻게 대물림되는가
전쟁과 분쟁 지역의 소식을 들으면 우리는 ‘또야?’라며 무력감을 느끼곤 합니다. 이 끊이지 않는 폭력의 이면에는 ‘세대 간 트라우마’라는 무서운 기제가 작동합니다. 할아버지 세대의 공포와 분노가 아버지에게, 그리고 그 상처가 다시 아들에게 이야기와 교육, 사회적 분위기를 통해 그대로 전달되는 것이죠. ‘우리’라는 내집단은 피해자로, ‘저들’이라는 외집단은 가해자로 명확히 구분됩니다. 이 과정에서 상대방은 나와 같은 감정을 가진 인간이 아닌, 제거해야 할 위협으로 ‘탈인간화’됩니다. 슬프게도, 한쪽의 트라우마는 다른 쪽의 트라우마를 먹고 자라납니다. 이 비극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가해와 피해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공감과 성찰이 필요합니다.
원망과 복수의 마음을 끊어낼 수 있을까요?
경향신문 사회

보이지 않는 위험과 우리의 '정상성 편향'

보이지 않는 위험과 우리의 '정상성 편향'
기후 변화가 심각하다는 말,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왜 당장 행동에 나서지 않을까요? 심리학에는 ‘정상성 편향(Normalcy Bias)’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큰 위기 상황에서도 ‘설마 별일 있겠어?’, ‘지금껏 괜찮았으니 앞으로도 괜찮을 거야’라며 일상을 유지하려는 심리적 경향이죠. 우리 뇌는 거대하고 추상적인 위협보다 당장 눈앞의 문제를 더 중요하게 여기도록 진화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른 더위로 인한 사망 소식은 더 이상 기후 변화가 먼 미래의 일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설마’가 현실이 된 것이죠. 이는 ‘위험하다는 것을 알지만, 평소처럼 행동하는’ 우리에게 강한 ‘인지 부조화’를 일으킵니다. 이제 그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시간이 된 것 아닐까요?
내일도 오늘과 같을 거라는 믿음, 얼마나 안전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