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마음 연구소 · my-mind.kr진성오 박사 칼럼

THE MIND GAZETTE

임상심리학자가 바라보는 오늘의 뉴스

2026년 5월 17일 일요일
발행 2026-05-16
경향신문 사회

시끄러운 아이들, 소음이 된 웃음소리의 심리학

시끄러운 아이들, 소음이 된 웃음소리의 심리학
필자의 어린 시절, 운동회는 온 동네의 축제였다. 확성기에서 울려 퍼지는 교장 선생님의 훈화와 만국기, 솜사탕, 그리고 아이들의 떠나갈 듯한 함성까지. 모든 것이 당연한 풍경이었다. 그런데 이제 운동회는 민원의 대상이 되었다. 아이들의 함성은 소음이 되었고, 경찰이 출동하는 사건이 되었다. 무엇이 우리를 이토록 각박하게 만들었을까? 어째서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더는 견디지 못하는 사회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리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적과 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사상가 르네 지라르(René Girard)는 공동체 내에 갈등과 긴장이 쌓이면, 그 분노를 해소하기 위해 만만한 상대를 골라 비난을 퍼붓는 ‘희생양 메커니즘’이 작동한다고 말했다. 사회가 감당하기 힘든 스트레스, 이를테면 치솟는 집값, 팍팍한 살림, 불안한 미래, 이웃과의 단절 같은 진짜 문제 앞에서 우리는 무력감을 느낀다. 그 거대한 문제와 직접 싸우는 대신, 우리는 가장 손쉽고 연약하며 항변하지 못하는 대상을 찾아 분노를 투사하는 것이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그 자체로 죄가 없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가장 안전한 공격 대상, 즉 희생양이 되기 쉽다. 어디로 가야 할까? 이 갈등의 실마리는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까? 어쩌면 문제는 소리의 크기가 아니라 마음의 거리일 것이다. 인지행동치료의 창시자 아론 벡(Aaron Beck)은 우리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스스로 만든 ‘인지왜곡’의 틀로 본다고 설명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흑백논리적 사고’다. 세상은 ‘완벽한 고요’ 아니면 ‘참을 수 없는 소음’ 둘 중 하나가 아니다. 그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삶의 소리들이 존재한다. 아이들의 활기찬 에너지가 ‘소음’이라는 단 하나의 부정적 단어로 규정되는 순간, 우리는 그 소리가 담고 있는 생명력, 즐거움, 미래의 희망 같은 다른 모든 의미를 잃어버린다. 대화와 타협의 공간은 그렇게 사라진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필자 역시 주말 아침 윗집 아이의 쿵쿵거리는 발소리에 미간을 찌푸린 경험이 있다. 그 순간 필자는 한 아이의 즐거운 아침을 상상하기보다, 나의 고요한 휴식을 방해하는 ‘침입자’로 여겼던 것이다. 그 아이의 잘못이 아니라, 세상을 ‘나’ 중심으로만 해석하려 했던 필자의 왜곡된 마음이 문제였을 것이다. 운동회 소음 문제는 어쩌면 우리 사회 전체가 마주한 거대한 거울과 같다. 그 거울 속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얼마나 인색해졌는지,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가난해졌는지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당신의 관용은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경향신문 사회

24억의 꿈, 우리는 희망을 사는가 절망을 사는가

24억의 꿈, 우리는 희망을 사는가 절망을 사는가
로또는 가능성의 미끼로 희망을 파는 사업이다. 수학적으로 814만 분의 1, 벼락에 맞을 확률보다 낮다는 이 사실을 우리는 모두 안다. 그럼에도 매주 토요일 저녁, 수많은 사람들이 작은 공의 움직임에 숨을 죽인다. 1등 당첨금이 24억이라는 뉴스에 ‘나도 한번’이라는 생각을 품는다. 왜 우리는 이토록 비합리적인 확률에 기꺼이 돈과 기대를 거는가? 아마도 우리는 논리가 아닌 주문을 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마술적 사고(Magical Thinking)’라 부른다. 발달심리학자 장 피아제(Jean Piaget)는 어린아이들이 자신의 생각이나 말만으로 현실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는 시기가 있다고 했다. 어른이 되어서도 우리는 스트레스가 심하거나 통제력을 잃었다고 느낄 때 이런 원시적 사고방식으로 퇴행하곤 한다. 나의 간절함이, 내가 특별히 고른 이 번호가, 이 차가운 우주적 확률을 넘어설 것이라는 믿음. 그것은 이성이 아니라 마법에 가깝다. 여기에 언론은 ‘가용성 휴리스틱(Availability Heuristic)’이라는 심리적 함정을 파놓는다. 우리의 뇌는 수백만 명의 낙첨자가 아니라, 뉴스에 나온 단 몇 명의 당첨자 이야기에 온통 마음을 빼앗긴다. 생생하고 극적이며 감정적인 정보일수록 더 쉽게 떠오르고, 우리는 그것이 마치 더 자주 일어나는 일인 것처럼 착각한다. 로또는 바로 이 착각을 먹고 자란다. 물론 일주일의 작은 활력소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의 삶이 매주 토요일 저녁의 추첨만을 바라보고 있다면, 우리는 어쩌면 희망이 아니라 절망을 유예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노력을 잠시 잊게 하는 달콤한 마취제라면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당신의 희망은 정말 종이 한 장에 담겨 있습니까?
BBC News World

고래를 죽인 선의, 돕는다는 것의 함정

고래를 죽인 선의, 돕는다는 것의 함정
상담실에 처음 온 내담자들은 종종 필자에게 “저를 고쳐달라”고 말한다. 그럴 때마다 필자는 조용히 답한다. “저는 당신을 고칠 수 없습니다. 다만 당신이 스스로 길을 찾을 때까지 함께 걸을 뿐입니다.” 고래를 구하려던 사람들의 마음은 의심할 여지 없이 선했다. 그들은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그 지극한 선의가 고래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이자 죽음의 원인이 되었을 수 있다. 참으로 역설적인 비극이다. 여기서 우리는 ‘돕는다’는 행위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의학계에는 ‘의인성 손상(Iatrogenesis)’이라는 용어가 있다. ‘치료자에 의해 발생하는 손상’을 뜻한다. 좋은 의도로 행한 치료가 오히려 환자를 해치는 경우다. 이는 심리상담이나 인간관계에서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상대방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행해지는 섣부른 조언, 원치 않는 개입, 성급한 해결책 제시는 모두 ‘심리적 의인성 손상’을 유발할 수 있다. 우리는 종종 상대를 돕는 것이 아니라, 돕고 싶어 하는 ‘나의 욕구’를 채우고 있을 뿐이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위해 번데기 속에서 발버둥 칠 때, 안타까운 마음에 껍질을 찢어주면 어떻게 될까? 나비는 날지 못하고 죽는다. 스스로의 힘으로 날갯짓을 단련할 기회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돕는다는 것은 때로 상대의 힘을 빼앗는 행위가 되기도 한다. 누군가 힘들어할 때, 우리는 무언가를 ‘해주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때로는 그저 곁에 머무는 것, 판단 없이 들어주는 것, 침묵 속에서 함께 아파해 주는 것이 가장 깊은 위로이자 진정한 도움일 수 있다. 우리의 선의가 상대에게 또 다른 짐이 되지 않도록, 한 걸음 물러설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해 보인다.
당신의 도움은 정말 그를 위한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