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마음 연구소 · my-mind.kr진성오 박사 칼럼

THE MIND GAZETTE

임상심리학자가 바라보는 오늘의 뉴스

2026년 5월 18일 월요일
발행 2026-05-17
경향신문 사회

우리 안의 희생양, 강남역의 포스트잇

우리 안의 희생양, 강남역의 포스트잇
필자도 그날 밤, 잠을 설쳤다. 뉴스를 보고 든 생각은 분노도, 슬픔도 아닌 서늘한 공포였다. 내가, 내 가족이, 내 친구가 그 자리에 있었을 수도 있다는 현실감이 온몸을 옥죄는 듯했다. 다음날부터 강남역 10번 출구는 거대한 추모의 벽이 되었다. 형형색색의 포스트잇이 번져나갔다. ‘다음 생엔 꼭 남자로 태어나요’, ‘우리는 우연히 살아남았다’. 그 작은 종이들은 단순한 애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함께 앓게 된 상처, 즉 ‘집단 트라우마(Collective Trauma)’의 가시적 증거였다. 집단 트라우마란, 사회학자 카이 에릭슨이 버팔로 크릭 광산 붕괴 참사를 연구하며 제시한 개념이다. 재난이 공동체의 물리적 기반뿐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유대감과 세상에 대한 믿음이라는 심리적 구조마저 파괴해 버리는 현상을 말한다. 강남역 사건은 우리 사회, 특히 여성들에게 ‘일상의 공간은 안전하다’는 암묵적 믿음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포스트잇은 그 무너진 신뢰를 다시 세우려는, 찢겨나간 공동체의 감각을 필사적으로 봉합하려는 우리들의 몸부림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 거대한 슬픔과 공포의 물결에 맞서, 다른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것은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다”, “정신질환자 한 명의 일탈일 뿐이다”, “남녀 갈등을 조장하지 말라”. 왜 그랬을까? 왜 우리는 그토록 빨리 ‘한 미친놈의 소행’이라는 손쉬운 답을 찾으려 했을까? 아마도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희생양 메커니즘(Scapegoat Mechanism)’을 작동시킨 것인지도 모른다. 프랑스 사상가 르네 지라르가 말했듯, 공동체는 감당할 수 없는 불안과 죄책감에 휩싸일 때, 그 모든 원인을 한 개인이나 집단에게 뒤집어씌워 제물로 바친다. 그를 처단함으로써 우리는 정화되고, 질서는 회복되었다고 믿는다. 셜리 잭슨의 소설 ‘제비뽑기’에서 마을 사람들이 풍년을 위해 무고한 한 명을 골라 돌로 쳐 죽이듯 말이다. ‘정신질환자’라는 손쉬운 희생양을 내세움으로써, 우리 사회에 만연한 폭력과 차별이라는 더 불편하고 근본적인 문제를 외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 편이 훨씬 견디기 쉬웠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모두의 책임을 인정하는 것은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10년이 흘렀다. 포스트잇은 떼어졌지만, 그 자리에 남았던 질문은 여전히 우리 곁을 맴돈다. 우리는 또 다른 희생양을 찾아 문제를 덮을 것인가, 아니면 마침내 그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준비가 되었는가. 어디로 가야 할까? 그 답은 아마도 10년 전 그날, 우리가 서로의 슬픔에 연결되고자 했던 그 마음속에 있을 것이다.
만약 지금도 ‘그냥 미친놈 하나’의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또 다른 희생양을 찾게 될 것이다.

부부싸움과 노사협상의 공통점

부부싸움과 노사협상의 공통점
임상심리학자 진성오입니다. 삼성전자 노사의 파업 전야 소식을 접하며 많은 분이 우려와 피로감을 느끼실 겁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제 머릿속에는 노사관계 전문가의 분석이 아닌, 얼마 전 아내와 벌였던 냉전의 풍경이 겹쳐졌습니다. 왜일까요? 거대 담론과 지극히 사적인 갈등 사이에 대체 어떤 심리적 연결고리가 있기에, 저는 대치하는 노사 양측의 얼굴에서 제 아내와 저의 모습을 보았던 걸까요? 아내와의 다툼이 시작되면 저 역시 종종 잊곤 합니다. 지금 내 앞에서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는 저 사람이, 제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한 동반자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일단 ‘싸움’이라는 프레임에 갇히는 순간, ‘함께 문제를 해결해야 할 우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어떻게든 상대를 굴복시켜야 할 ‘너’와 나의 정당성을 입증해야 할 ‘나’만 남게 되죠. 이기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가 되는 처절한 전쟁터로 변하는 겁니다. 이 지점에서 사회심리학의 고전적인 개념 하나를 소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폴란드 출신의 영국 사회심리학자 헨리 타즈펠(Henri Tajfel)이 1970년대에 정립한 ‘최소 집단 패러다임(Minimal Group Paradigm)’과 그로부터 파생된 ‘내집단-외집단 편향(In-group/Out-group Bias)’입니다. 그의 실험은 지독하리만치 단순해서 오히려 더 섬뜩합니다. 그는 실험 참가자들에게 화가 클레와 칸딘스키의 그림 중 어느 쪽을 선호하는지 묻는 것과 같은, 사실상 아무런 의미 없는 기준으로 집단을 나누었습니다. ‘클레파’와 ‘칸딘스키파’가 된 것이죠. 놀라운 것은, 이렇게 임의적이고 일시적으로 형성된 집단 안에서도 사람들은 강한 소속감을 느끼며 자기 집단(내집단)에 속한 사람에게는 더 많은 보상을 주려 하고, 상대 집단(외집단)에게는 노골적으로 배타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사실입니다. 혈연도, 지연도, 학연도 아닌, 그저 방금 전 그림 취향 하나로 나뉜 사이인데도 말입니다. 노사 협상 테이블은 이 편향이 가장 거대하고 극적으로 펼쳐지는 무대입니다. ‘사측’과 ‘노측’이라는, 클레파나 칸딘스키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강력하고 역사적인 깃발 아래 모인 순간, 상대는 더 이상 한 아이의 아버지,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딸, 성실한 직장 동료가 아닙니다. 우리의 생존과 이익을 위협하는 ‘적대적 타자’로 규정되기 십상이죠. 여기에 또 하나의 무서운 심리적 함정이 작동합니다. 바로 ‘기본적 귀인 오류(Fundamental Attribution Error)’입니다. 스탠퍼드 대학의 리 로스(Lee Ross) 교수가 명명한 이 개념은, 타인의 행동을 해석할 때 그 사람이 처한 ‘상황’적 요인은 무시하고, 그 사람의 ‘내적 기질’이나 ‘성격’ 탓으로 돌려버리는 경향을 말합니다. 가령 내가 약속에 늦으면 ‘차가 너무 막혀서’(상황)이지만, 남이 늦으면 ‘원래 게으르고 약속을 우습게 아는 사람이라서’(기질)라고 생각하는 식이죠. 노사 갈등에서는 이 오류가 양측의 불신을 증폭시킵니다. 노조는 사측의 제안을 ‘경영 환경 악화에 따른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상황)으로 보기보다 ‘노동자를 쥐어짜려는 탐욕스러운 본성’(기질)의 발현으로 해석하기 쉽습니다. 반대로 사측은 노조의 요구를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절박함’(상황)으로 공감하기보다 ‘회사는 생각 안 하는 이기적인 집단’(기질)으로 매도하게 되고요. ‘저들은 원래 저런 인간들’이라는 낙인이 찍히는 순간, 대화의 문은 굳게 닫힙니다. 이렇게 내집단과 외집단으로 나뉘어 서로를 기질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이 각자의 방에 모여 회의를 하면 어떻게 될까요? ‘집단 양극화(Group Polarization)’ 현상이 불길처럼 번집니다. 비슷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끼리 토론하면, 결론은 중립이 아닌 더 극단적인 방향으로 쏠리게 됩니다. ‘역시 저들은 말이 안 통해’, ‘더 강하게 나가지 않으면 우리만 바보가 된다’는 목소리가 내부의 온건하고 합리적인 목소리를 압도해버립니다. 마치 영화 <타이타닉>에서 배는 이미 빙산에 부딪혀 가라앉고 있는데, 1등실과 3등실 승객들이 서로 자기 구역의 갑판 의자가 더 좋다고 싸우는 꼴이랄까요. 배가 가라앉으면 모두가 죽는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정말 서로의 파멸을, 배의 침몰을 원하는 걸까요? 아닐 겁니다. 단언컨대 아닐 겁니다. 회사의 지속 가능한 성장과 노동자의 안정적인 삶이라는 공동의 목표, 즉 ‘우리 모두가 살아야 할 배’의 존재를 그들이 모를 리 없습니다. 하지만 ‘이겨야 한다’는 강박, ‘밀리면 끝장’이라는 불안, 그리고 ‘저들은 원래 글러먹었다’는 편견의 안개가 너무 짙게 깔린 나머지, 바로 눈앞에 있는 그 배의 존재를 보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어쩌면 협상이든, 부부싸움이든 가장 어려운 첫걸음은 상대방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기술을 배우는 것이 아닐 겁니다. 내가 지금 싸우고 있는 상대가 ‘적’이 아니라, 이 배가 침몰하면 함께 물에 빠질 ‘동승자’라는 서늘한 사실을 다시금 기억해내는 것. ‘너’와 ‘나’의 프레임을 깨고 ‘우리’라는 관점을 복원하려는 의식적인 노력. 그것이 가장 중요하고도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오늘 저녁, 저는 집에 돌아가 아내에게 말을 걸어볼 생각입니다. 어제 다툼에서 내 주장이 왜 옳았는지를 설명하는 대신, 우리가 함께 타기로 한 인생이라는 배가 혹시 어디 금이 간 곳은 없는지, 함께 노를 저을 힘은 남아있는지 조심스럽게 물어봐야겠습니다. 이기는 싸움보다 지키는 싸움이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저는 상담실에서 그리고 제 삶에서 매일같이 배우고 있으니까요.
가장 이기기 어려운 싸움은 ‘우리’를 지키는 싸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