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마음 연구소 · my-mind.kr진성오 박사 칼럼

THE MIND GAZETTE

임상심리학자가 바라보는 오늘의 뉴스

2026년 5월 24일 일요일
발행 2026-05-24
한겨레 사회

'손가락질'의 심리학: 우리는 왜 '그들'을 미워하는가

최근 조수진 노무현재단 이사가 봉하마을에서 특정 온라인 커뮤니티의 상징적 제스처인 '손가락질'을 하는 사진이 찍혔다고 주장하면서 사회적 논란이 일었습니다. 한 사람의 행위가 담긴 사진 한 장이 우리 사회의 깊어진 갈등과 혐오 표현의 문제점을 다시금 수면 위로 끌어올린 사건입니다. 그저 손가락 하나를 펴고 구부렸을 뿐인데, 왜 이토록 많은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고 분노를 일으키는 것일까요? 필자는 오늘 이 '손가락질'이라는 행위가 품고 있는 심리적 의미를 함께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손가락질'을 마주합니다. 때로는 물리적인 손가락질이 아니더라도, 누군가를 향한 날카로운 비난이나 조롱의 시선 또한 일종의 손가락질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의 기저에는 대개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믿는 '인지왜곡'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인지왜곡이란 말 그대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의 신념이나 감정에 따라 정보를 '왜곡'하여 받아들이는 현상을 뜻합니다. 인지행동치료의 아버지라 불리는 아론 벡(Aaron Beck) 박사는 인간이 스트레스 상황에서 비합리적이고 왜곡된 사고를 통해 고통받는다고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작은 실수 하나로 '나는 완벽하게 실패했어'라고 생각하는 '흑백 논리'에 빠지기도 하고, 특정 사건을 통해 '모든 사람이 나를 싫어할 거야'라고 확대 해석하는 '과잉 일반화'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특정 집단을 향해 가하는 '손가락질' 또한 이러한 인지왜곡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라는 울타리 안에서 '그들'을 규정하고, 그들에게 부정적인 속성을 부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원래부터 이기적이고, 비합리적이며, 우리 사회에 해를 끼치는 존재라고 단정해 버리는 것은 아닐까요? 이러한 왜곡된 인지는 '확증 편향'을 강화합니다. 즉, '그들'이 나쁜 존재라는 기존 신념을 뒷받침하는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수용하고, 반대되는 증거는 애써 무시하거나 축소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과정은 '그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고, 손가락질이라는 배제의 행위로 이어지는 듯 합니다. 이러한 인지왜곡은 종종 '투사적 동일시'나 '희생양 메커니즘'이라는 방어기제와 얽혀 나타나기도 합니다. 투사적 동일시는 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in)과 같은 정신분석학자들이 설명한 개념으로, 자신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감정이나 충동을 타인에게 '투사'하고, 그 타인이 마치 그 감정을 실제로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끼는 복잡한 심리 과정입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내면에 있는 불안이나 공격성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여, '저 사람이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고 느끼는 식입니다. 사회적 차원에서는 우리 안의 불만과 좌절을 특정 집단이나 개인에게 '투사'하여 그들을 '희생양'으로 삼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류학자 르네 지라르(René Girard)는 사회적 갈등이 극에 달했을 때, 공동체 전체의 불안과 폭력성이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게 집중되어 그들이 '희생양'으로 지목되고, 이들을 제거함으로써 일시적인 평화를 얻으려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마치 고대 사회에서 재앙이 닥쳤을 때 특정 인물을 '희생양'으로 삼아 공동체의 죄를 씻으려 했던 것처럼 말이죠. 우리 사회의 '손가락질'은 바로 이러한 '희생양 메커니즘'의 현대적 발현일지도 모릅니다. 공동체의 문제나 개인의 무력감을 특정 집단에게 전가하고, 그들을 비난함으로써 우리 스스로는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느끼거나, 불안을 해소하려는 시도인 것입니다. 이러한 심리적 역동 속에서 우리는 과연 '손가락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아마도 우리 모두는 때때로 누군가를 향해 보이지 않는 손가락질을 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손가락질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뒤에 어떤 우리의 '인지왜곡'과 '방어기제'가 숨어 있는지를 성찰하는 일입니다. 필자는 우리가 이러한 '손가락질'의 심리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통합과 치유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향한 비난의 손가락을 거두고, 잠시 멈춰 서서 우리 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어쩌면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의 그림자일지도 모릅니다.
비난의 손가락을 거두고, 우리 마음속 그림자를 마주할 용기는 우리를 더 큰 이해로 이끌 것입니다.
경향신문 사회

조회수 시대, 가려진 진실들

조회수 시대, 가려진 진실들
오늘날 우리는 '효율과 트래픽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기사는 이러한 시대의 단면을 날카롭게 보여주는데, 유튜브 같은 플랫폼이 '돈 안 되는' 이야기에는 좀처럼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특히 강원대병원 어린이 병동에서 손길을 기다리며 울고 있는 한 중증 장애 아동의 이야기는, 조회수라는 잣대로는 결코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소중한 삶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지 일깨워줍니다. 필자는 이 기사를 읽으며 우리 사회가 어떤 방식으로 중요성을 판단하고 있는가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않으려 하는 걸까요? 왜 어떤 이야기는 끊임없이 회자되고, 어떤 이야기는 소리 없이 잊히는 걸까요? 이면에는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은 특정한 심리적 기제들이 작동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개념은 '인지왜곡'입니다. 인지왜곡이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특정 방식으로 해석하거나 비틀어 받아들이는 사고방식을 말합니다. 인지치료의 창시자 아론 벡(Aaron Beck)은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떠올리는 생각들, 즉 '자동적 사고'가 종종 현실을 왜곡하여 우울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 감정을 유발한다고 보았습니다. 우리 사회는 지금 '조회수'와 '관심'이라는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인지왜곡에 빠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즉, 조회수가 높으면 중요한 것이고, 낮으면 중요하지 않다는 식의 '흑백논리적 사고'나, 모든 것을 '성과'로 연결하려는 '파국화' 같은 왜곡이 널리 퍼져 있는 듯합니다. '돈이 되는 것'만이 가치 있다는 무의식적인 전제가 우리 사고를 지배하면서, 소외된 이들의 삶은 그저 '돈 안 되는' 이야기로 치부되는 것이죠. 이러한 인지왜곡이 개인의 차원을 넘어 집단적으로 나타날 때, 우리는 '집단사고'를 의심해볼 수 있습니다. 심리학자 어빙 재니스(Irving Janis)는 집단사고를 집단 구성원들이 만장일치를 이루려는 압력 때문에 현실적인 대안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비판적 사고를 억압하는 현상으로 정의했습니다. 마치 영화 '트루먼 쇼'에서 트루먼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거대한 연극의 일부가 되어 그를 속이는 것처럼, 우리 사회 전체가 '조회수'라는 목표 아래 암묵적인 합의를 이룬 것은 아닐까요? '돈 안 되는'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비효율적'이라는 집단적 무언의 압력이 작동하면서, 소수의 목소리가 묻히고 중요한 문제들이 외면받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심코 클릭하는 영상 하나, 무심코 넘기는 기사 하나를 통해 이러한 집단사고에 동참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필자 역시 가끔은 흥미 위주의 자극적인 콘텐츠에만 눈길이 가는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복잡하고 무거운 현실보다는 가볍고 유쾌한 이야기에 더 쉽게 반응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본능적인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걸음 물러나 생각해본다면, 우리가 외면하는 그 '돈 안 되는' 이야기 속에 진정한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숨어 있을 때가 많습니다. 어쩌면 우리 사회는 지금 '조회수'라는 숫자에 매몰되어, 정작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는 '집단적 무관심'이라는 병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니 우리, 잠시 스마트폰 화면에서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는 것은 어떨까요? 당장 '좋아요'나 '구독'을 누를 수는 없겠지만, 우리의 작은 관심이 누군가의 삶에 예상치 못한 온기를 불어넣을 수도 있습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뒤편에 가려진 소박한 빛들을 찾아보는 일,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공감과 성장을 위한 첫걸음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작은 관심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