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지에서 터진 '갈등 시한폭탄'

남극기지에서 폭언과 폭행, 성희롱 신고가 이어지고 급기야 흉기 난동까지 벌어졌다는 보도에 필자는 깊은 우려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극한의 환경에 고립된 인간 집단에서 벌어진 이 일련의 사건들은 마치 작은 사회 실험실에서 터져 나온 '갈등 시한폭탄'처럼 느껴집니다.
우리는 왜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서 인간성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게 되는 걸까요? 아마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바로 '번아웃'일 것입니다. 오랜 기간 외부와 단절된 채 일과 생활이 뒤섞인 공간에서 극한의 스트레스와 피로가 누적되면, 개인의 정신 에너지는 고갈되기 마련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번아웃 증후군'이라 일컫는데, 심한 정서적 탈진과 냉담함, 그리고 성취감 저하를 특징으로 합니다. 독일의 심리학자 헤르베르트 프로이덴버거가 1970년대에 처음 개념화한 이래, 번아웃은 현대인의 만성적인 문제로 자리 잡았습니다. 남극이라는 특수한 환경은 이런 번아웃을 가속화시키는 완벽한 조건입니다. 몸은 쉬고 있어도 마음은 늘 긴장 상태에 있고, 스트레스를 해소할 마땅한 방법도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작은 자극에도 쉽게 짜증이 나고, 타인에게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기 쉬워지는 것이지요.
번아웃 상태에 이르면 사람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여러 '방어기제'를 사용합니다. 때로는 현실을 '부정'하거나, 불쾌한 감정을 합리화하며 회피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고립된 집단에서는 개인의 방어기제가 집단의 역기능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외부 정보가 차단되고 내부 구성원들끼리만 상호작용하는 환경에서는 '집단사고'의 위험이 커집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어빙 재니스는 집단사고를 '응집력이 강한 집단이 의사결정 과정에서 비판적 사고를 중단하고, 만장일치에 대한 압력에 굴복하는 현상'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남극기지처럼 폐쇄적인 공간에서는 집단 내의 소수 의견이 묵살되거나, 갈등을 회피하기 위해 문제를 덮어두려는 경향이 강해질 수 있습니다. 이는 결국 작은 불씨가 큰불로 번지게 만드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런 집단적 역기능 속에서 갈등은 더욱 깊어지고, 때로는 '투사적 동일시'라는 복잡한 심리 기제가 작동하기도 합니다. 영국의 정신분석학자 멜라니 클라인이 제시한 개념인 투사적 동일시는 개인이 자신의 받아들이기 힘든 감정이나 충동을 타인에게 '투사'하고, 그 타인이 무의식적으로 그 투사된 감정을 '동일시'하여 실제로 행동하게 되는 과정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신의 숨겨진 분노를 특정 동료에게 투사하면, 그 동료는 자신도 모르게 분노를 느끼고 공격적인 행동을 하게 될 수 있습니다. 남극기지에서 벌어진 폭언, 폭행, 흉기 난동과 같은 극단적인 사건들은 이런 투사적 동일시가 통제 불능의 상태로 치달았을 때 나타나는 비극적인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견딜 수 없는 압박감과 불안, 분노가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전염되고, 결국 집단 전체의 정신 건강을 좀먹는 것이지요.
필자는 이 기사를 읽으며 우리 사회의 축소판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졌습니다. 남극기지처럼 물리적으로 고립된 곳은 아니지만, 우리는 각자의 삶 속에서 다양한 '심리적 고립'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치열한 경쟁 사회, 삭막한 도시 생활, 그리고 비대면 소통이 주를 이루는 온라인 세상 속에서 우리는 혹시 번아웃에 시달리며 자신도 모르게 타인에게 공격성을 투사하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집단의 역기능에 휩쓸려 중요한 문제들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 안의 괴물'을 다스리지 못한다면, 우리 모두는 언제든 '갈등 시한폭탄'의 희생양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건강한 집단이란, 구성원 개개인의 심리적 안녕을 존중하고, 갈등의 씨앗이 싹트기 전에 이를 인식하고 건강하게 해소하려는 노력이 동반될 때 비로소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 주변의 고립된 이웃들에게 혹시 무관심하지는 않았는지, 작은 관심의 손길이 절실한 시점입니다.
우리 모두는 연결된 존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