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라는 이름의 함정, 80대 시위자의 가스총

지난 20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앞에서 열린 개표소 봉쇄 시위에 가스총을 소지한 채 참여하려던 80대 남성이 경찰에 제지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규탄하는 시위는 16일째 이어지고 있었고, 이러한 와중에 80대 노인이 가스총을 들고 나섰다는 사실은 필자에게 여러 생각의 물음표를 던져주었습니다.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를 거리로 나서게 하고, 심지어 위험한 도구까지 들게 한 그 '믿음'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과연 그를 비난할 수만 있을까요, 아니면 우리 사회의 어떤 단면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필자는 이 사건을 접하며 우리 모두가 겪을 수 있는 ‘인지왜곡’이라는 심리적 현상과, 그것이 집단 속에서 어떻게 증폭되는지를 다시금 곱씹어 보게 됩니다. 인지왜곡이란 개인이 현실을 비합리적이거나 부정확하게 해석하는 사고방식, 즉 '생각의 오류'를 뜻합니다. 이는 독일의 심리학자 아론 벡(Aaron Beck)이 주창한 인지치료의 핵심 개념 중 하나로, 우울증이나 불안장애를 겪는 사람들이 흔히 보이는 사고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흑백논리'나 '과잉 일반화', '파국화'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극단적으로 보거나, 하나의 부정적 사건으로 모든 것이 망했다고 여기는 식이죠.
이러한 인지왜곡은 일상생활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필자가 발표를 망쳤다고 생각하면 하루 종일 '나는 아무것도 제대로 못 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단정 짓는 경우가 있습니다. 실제로는 발표 내용이 좋았어도, 일부 실수에만 집중하여 전체를 부정적으로 판단하는 것이죠. 이번 시위에 참여한 분들, 특히 가스총까지 들고 나선 80대 남성에게는 '부정선거'라는 강력한 믿음이 자리 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투표용지 부족이라는 하나의 사건이 '선거 전체가 조작되었다'는 식으로 확대 해석되고, 이 과정에서 다른 객관적인 증거들은 무시되거나 왜곡되어 받아들여지는 '확증 편향'이 작동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자신들의 믿음을 뒷받침하는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정보는 '가짜 뉴스'로 치부해 버리는 것이지요. 이러한 '선택적 주의'와 '확증 편향'은 인지왜곡을 강화하는 강력한 기제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개인의 인지왜곡은 어떻게 80대 노인에게 가스총을 들게 할 만큼 강력한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었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집단사고'(Groupthink)라는 개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일 대학교 심리학자 어빙 재니스(Irving Janis)가 제시한 이 개념은, 응집력이 강한 집단에서 구성원들이 비판적 사고를 유보하고, 집단의 만장일치에 대한 압력에 굴복하여 비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는 현상을 말합니다. 영화 '12인의 성난 사람들'에서 처음에는 대다수가 유죄라고 주장했지만, 소수의 합리적인 의심이 제기되자 점차 비판적 사고가 살아나는 과정을 보여주듯, 집단은 때로 개인의 판단력을 마비시킬 수 있습니다.
'부정선거'라는 믿음을 공유하는 집단 안에서, 개인은 자신의 생각을 검증할 기회를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내가 틀릴 리 없다'는 식의 '집단적 합리화'가 일어나고, 반대 의견은 '내부의 적'이나 '외부의 공격'으로 간주되어 배척됩니다. 80대 남성의 가스총 소지 행위는 이러한 집단사고의 극단적인 발현일 수 있습니다. '부정선거'라는 인지왜곡이 집단 속에서 견고한 '진실'로 굳어지고, 이 '진실'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행동이든 정당화될 수 있다는 위험한 믿음으로까지 발전한 것은 아닐까요? 아마도 그는 자신을 '정의를 수호하는 투사'로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집단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부여받고, 그 역할에 충실하고자 할 때 평소라면 하지 않을 행동도 서슴지 않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필자는 이 사건을 통해 우리 사회가 겪는 갈등의 뿌리 깊은 원인을 다시 한번 성찰합니다. 서로 다른 '진실'을 주장하며 평행선을 달리는 우리들의 모습은, 어쩌면 각자의 인지왜곡과 그로 인해 강화된 집단사고의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믿음'이 절대적인 진실이라고 확신하는 순간, 다른 이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게 되고, 때로는 극단적인 행동까지 정당화할 수 있는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각자가 자신의 '확고한 믿음'을 잠시 내려놓고, 혹시 나의 생각에도 '인지왜곡'은 없는지, 내가 속한 집단의 '집단사고'에 휩쓸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과연 '진실'을 보고 있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