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민 혐오, 우리 마음의 거울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이주민을 향한 혐오 표현이 또다시 불거졌다는 소식입니다. 혐오의 대상이 된 이주민들은 불안과 고통을 호소했고, 이에 맞서 지역 공동체는 연대하며 '혐오'에 맞서는 움직임을 보였다고 합니다. 이런 소식을 접할 때마다 필자는 우리 사회의 어떤 '그림자'가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알게 모르게 많은 것을 투사하며 살아갑니다. '투사'라는 말은 심리학에서 자신의 받아들이기 어려운 생각이나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방어기제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조금 더 복잡한 형태가 있습니다. 바로 '투사적 동일시'라는 개념입니다. 이는 영국의 정신분석학자 멜라니 클라인이 주로 이야기했던 개념으로,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감정이나 충동을 타인에게 던져 넣고(투사), 그 타인이 마치 그 감정을 가진 사람처럼 행동하게끔 무의식적으로 조종하며(동일시), 결국 그 감정을 타인에게서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쉽게 말해, 내가 느끼는 불안이나 분노를 남에게 뒤집어씌우고, 그 사람이 정말 그런 불안하고 분노하는 사람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죠. 흡사 영화 '조커'에서 주인공 아서 플렉이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투사된 폭력성을 내면화하며 괴물로 변해가는 과정과도 비슷합니다. 우리는 이주민들에게서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요? 아마 우리 자신의 불안과 결핍을 투사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투사적 동일시가 집단적으로 나타날 때, 우리는 '희생양 메커니즘'이라는 현상을 목격하게 됩니다. 프랑스의 인류학자 르네 지라르는 사회 내부에 갈등과 긴장이 고조될 때, 집단은 그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희생양'으로 삼아 모든 죄와 책임을 전가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과거에는 전염병이나 가뭄 같은 재앙의 원인을 특정 집단에게 돌리고 그들을 추방하거나 처벌하는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마치 무리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가장 약한 개체를 공격하여 내부의 결속을 다지는 늑대들의 모습과도 닮아 있습니다. 이주민들은 종종 사회적 약자로서, 경제적 어려움이나 사회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되며 손쉬운 '희생양'이 되곤 합니다. '이주민 때문에 일자리가 줄어든다', '이주민 때문에 범죄가 늘어난다'와 같은 주장은 때로는 합리적 근거 없이, 우리 사회가 겪는 복잡한 문제들을 단순화하고 특정 집단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무의식적인 시도일 수 있습니다.
필자는 언젠가 상담실에서 한 내담자가 자신의 실패를 모두 부모 탓으로 돌리며 격렬하게 분노하는 모습을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부모의 영향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내담자는 자신의 무기력함과 불안을 부모에게 투사하며, 부모가 자신을 '망친' 존재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부모가 정말 '나쁜' 사람처럼 느껴졌다고 고백했죠. 이처럼 개인의 삶에서도, 집단의 삶에서도 우리는 쉽게 '희생양'을 찾아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유혹에 빠지곤 합니다.
하지만 '대림동 모델'처럼, 혐오에 맞서 연대하고 소통하려는 움직임은 우리에게 다른 길을 보여줍니다. 투사와 희생양 메커니즘은 결국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갈등과 분열을 낳을 뿐입니다. 우리 안의 그림자를 직면하고, 타인을 통해 우리 자신의 불안을 해소하려 하지 않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길일 것입니다.
우리 안의 그림자를 직면할 용기가 필요한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