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마스터의 덫, 우리는 왜 숫자에 목을 매는가
한 언론 보도에 따르면, 배달 플랫폼의 라이더들이 최고 등급인 ‘그랜드마스터’를 유지하기 위해 목숨을 건 운전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필자는 오래전 온라인 게임에 빠져있던 시절이 떠올랐다. 화면 속 가상의 ‘명예 점수’를 조금이라도 더 올리기 위해 며칠 밤을 새우던, 지금 생각하면 부질없고도 치열했던 그 시간이 말이다.
우리는 어째서 이토록 ‘등급’과 ‘점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일까? 단순히 더 많은 보상을 얻기 위함일까? 아마 그 이면에는 더 복잡한 심리적 기제가 작동하고 있을 것이다. 임상심리학에서는 이를 ‘부적응적 완벽주의’의 한 단면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완벽주의’라고 하면 흔히들 긍정적인 특성으로 생각하기 쉽다. 더 높은 목표를 세우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모습은 분명 칭찬받을 만하다. 하지만 심리학자 돈 E. 해머첵은 건강한 완벽주의와 신경증적 완벽주의를 구분했다. 전자가 성취 자체에서 기쁨을 찾는다면, 후자는 실패에 대한 극심한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그랜드마스터가 아니면 안 된다’는 강박은, 최고가 되었을 때의 만족감보다는 최고가 아닐 때의 나를 ‘실패자’로 규정하는 내면의 목소리 때문일 수 있다. 그들에게 등급은 성취의 훈장이 아니라, 실패하지 않았다는 안도의 증표인 셈이다.
여기에 또 하나의 심리적 함정이 더해진다. 바로 인간의 뇌가 ‘인지적 구두쇠’처럼 작동하려는 경향이다. 사회심리학자 수잔 피스크와 셸리 테일러가 제시한 이 개념은, 우리 뇌가 복잡하고 모호한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가능한 한 정신적 에너지를 아끼려 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유능한 라이더인가?’, ‘나는 이 사회에서 가치 있는 존재인가?’와 같은 복잡한 질문 앞에서, 우리의 뇌는 쉽고 빠른 답을 찾고 싶어 한다. 바로 이때, ‘그랜드마스터’라는 등급은 너무나도 매혹적인 지름길이 된다.
내 노력의 가치, 나의 숙련도, 동료들과의 관계, 어제의 실수와 내일의 계획 같은 복잡한 현실을 일일이 평가하는 대신, 앱 화면에 뜬 하나의 단어로 모든 것을 요약해버리는 것이다. 플랫폼은 바로 이 ‘인지적 구두쇠’의 속성을 교묘하게 파고든다. ‘생각하지 마. 그저 이 숫자를 봐. 이 등급이 바로 너야.’ 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 자신을 평가하고 증명하는 지난한 과제를 알고리즘에 위탁해 버리고 만다. 그 결과는 때로 혹독하다. 숫자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고, 건강을 해치고, 심지어 삶의 다른 소중한 가치들을 뒷전으로 밀어낸다.
필자 역시 한때 논문 인용 횟수나 책 판매 부수라는 숫자에 연연하던 때가 있었다. 그 객관적인 숫자가 필자의 학문적 가치를 증명해줄 것이라 믿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그 숫자가 오를 때의 짧은 희열보다, 행여나 떨어질까 전전긍긍하던 불안의 시간이 훨씬 더 길었던 것 같다. 만약 당신이 어떤 숫자나 등급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는 숫자로 평가받는 세상에 살고 있다. 하지만 그 숫자가 우리 자신은 아니다. 그 둘을 분리하는 것에서부터 진짜 ‘나’를 지키는 여정이 시작될 것이다.
숫자가 내가 되는 순간, 우리는 길을 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