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뒤 숨은 조용한 상실감

최근 한 매체에서 직장인 이모씨(41)가 '고기능 우울증' 관련 서적을 읽고 자신의 상태를 성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속으로는 깊은 무기력과 싸우는 모습은 필자가 임상 현장에서 종종 마주하는 안타까운 현실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괜찮은' 모습을 유지하려 애씁니다. 때로는 너무나 능숙하게 그 역할을 해내어 주변 사람들은 물론, 자기 자신조차 속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웃음 뒤에는 공허함이, 활기찬 일상 뒤에는 설명할 수 없는 무기력감이 자리 잡고 있다면, 우리는 어떤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들여다볼 '고기능 우울증'의 모습입니다.
'고기능 우울증'은 정식 진단명이라기보다는 대중적으로 통용되는 표현이지만, 임상적으로는 '지속성 우울장애(Persistent Depressive Disorder)'나 '주요 우울장애의 경도 삽화'와 유사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일상적인 기능을 유지하며 사회적 역할도 무리 없이 수행하지만, 내면 깊숙이 슬픔, 절망감, 무기력함이 만성적으로 깔려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마치 수면 위에서는 우아하게 떠 있지만, 물 아래에서는 끊임없이 발버둥 치는 '오리'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필자 역시 젊은 시절,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내려 애쓰면서도 밤마다 공허함에 시달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잘 지낸다'는 말을 들었지만, 내면은 시들어가는 꽃과 같았죠.
그렇다면 우리는 왜 겉으로는 '괜찮은' 척하면서 속으로는 병들어가는 것일까요? 어디서부터 우리의 '자기'가 고장 나기 시작한 걸까요? 필자는 오늘, 심리학자 에드워드 데시(Edward Deci)와 리처드 라이언(Richard Ryan)이 제시한 '자기결정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을 통해 그 답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이 이론은 인간에게는 세 가지 기본적인 심리적 욕구가 있으며, 이 욕구들이 충족될 때 진정한 행복과 성장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바로 '자율성', '유능감', 그리고 '관계성'입니다.
첫째, '자율성'은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려는 욕구입니다. 어린아이가 스스로 옷을 고르거나 장난감을 선택할 때 느끼는 만족감처럼, 우리는 자신의 삶을 주도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고기능 우울증'을 겪는 이들은 종종 타인의 기대나 사회적 역할에 갇혀 자신의 진정한 욕구와 선택권을 잃어버리는 듯 보입니다. '남들이 보기에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이 자신만의 '자율성'을 갉아먹는 것이죠. 마치 스스로 운전대를 잡지 못하고 누군가 조종하는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둘째, '유능감'은 어떤 일을 잘 해내고 싶고, 성취감을 느끼고 싶은 욕구입니다. 필자가 상담했던 한 직장인은 매번 '최고의 성과'를 내었지만, 정작 자신은 '이 정도는 누구나 하는 것'이라며 스스로를 깎아내렸습니다. 외부의 칭찬은 잠시뿐, 내면의 '유능감'은 채워지지 않는 바닥 없는 독과 같았죠. 아무리 많은 물을 부어도 계속 새어 나가는 독처럼, 자신의 성과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셋째, '관계성'은 타인과 연결되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입니다. 깊은 관계 속에서 우리는 안정감과 소속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고기능 우울증'을 겪는 이들은 자신의 약한 모습을 드러내면 관계가 깨질까 두려워 가면을 쓰곤 합니다. '나의 진짜 모습은 사랑받지 못할 거야'라는 두려움이 진정한 '관계성'을 방해하는 셈입니다. 마치 투명한 벽 뒤에 서서 다른 이들을 바라보는 듯한 고립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죠.
이 세 가지 기본적인 심리적 욕구가 충족되지 못할 때, 우리는 내면의 에너지를 잃고 무기력해지며, 겉으로는 잘 지내는 듯 보여도 속으로는 깊은 우울에 빠져들기 쉽습니다. 마치 배터리가 서서히 방전되어 가는데, 겉으로는 충전되는 척 위장하는 스마트폰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조용한 상실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필자는 우리에게 '가면을 벗을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완벽해 보이지 않아도 괜찮다는 자기 수용, 그리고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나는 사실 힘들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조금씩 '고기능 우울증'의 스펙트럼 위에 놓여 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마음이 보내는 작은 신호들을 무시하지 않고, 잠시 멈춰 서서 '나는 지금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느끼는가?' 하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는 것부터 시작해보면 어떨까요.
필자 역시 때로는 '완벽한 박사'의 가면을 쓰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거울 속 자신에게 '진성오, 너는 충분히 괜찮아'라고 말해줍니다. 우리 모두가 자신에게 조금 더 너그러워지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스스로에게 '괜찮다'고 말해주는 용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