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마음 연구소 · my-mind.kr진성오 박사 칼럼

THE MIND GAZETTE

임상심리학자가 바라보는 오늘의 뉴스

2026년 8월 6일 목요일
발행 2026-08-05
경향 사회

‘팬미팅 갑질’, 우리는 왜 침묵할까?

‘팬미팅 갑질’, 우리는 왜 침묵할까?
경기도의 한 사회복지시설에서 시설장의 축일을 기념해 1박2일 펜션 워크숍이 열렸고, 직원들은 '신부 콘셉트'로 흰 옷을 맞춰 입고 기념사진까지 찍었다는 소식은 우리 사회의 '직장 내 갑질'이 얼마나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대체 누가, 무엇 때문에 이런 상황을 보고도 침묵하거나 심지어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되는 걸까요? 마치 거대한 무언가에 휩쓸려 가는 듯한 느낌마저 줍니다. 필자는 이 소식을 접하며 우리 안에 내재된 '사회적 전염'이라는 심리적 현상을 떠올렸습니다. '사회적 전염'은 한 개인의 감정이나 행동, 심지어 신념이 다른 사람들에게 빠르게 확산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마치 감기 바이러스가 퍼지듯, 집단 내에서 특정 행동 양식이 유행처럼 번지는 것이지요. 이는 단순히 모방을 넘어, 타인의 행동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준거점이 되어버리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집니다.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의 연구는 이러한 '권위에 대한 복종'이 상상 이상으로 강력하게 작용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사람들은 특정 조건 하에서 자신의 양심이나 상식에 반하는 행동이라 할지라도, 권위자의 지시에 따라 수행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번 사건에서, '시설장'이라는 권위적 위치는 직원들에게 암묵적인 복종을 요구했을 것이고, 개개인은 혹시 모를 불이익이나 집단에서 소외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 뒤에는 '정체성 경제'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정체성 경제'는 단순히 돈을 버는 것을 넘어, 사회적 역할이나 직업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고, 그 안에서 안정감을 찾는 심리적 현상을 말합니다. 직장은 우리에게 생계뿐만 아니라 소속감, 인정, 그리고 자아실현의 기회를 제공하는 중요한 공간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 '경제' 활동이 자신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상황으로 변질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직원을 '팬'으로 호명하고, '축일 행사'라는 명목으로 사적인 행사에 동원하는 행위는 개인의 자율성과 직업적 정체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입니다. 직원들은 생계와 직결된 직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즉 '정체성 경제'의 위협 앞에서 자신의 감정과 판단을 억누르고 '감정노동'을 수행하게 됩니다. '감정노동'은 자신의 실제 감정과는 다른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심리적 부담을 뜻합니다. 억지로 웃고, 즐거운 척하고, 심지어 '신부 콘셉트'의 복장까지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서 직원들의 마음은 얼마나 큰 소진을 겪었을까요? 어쩌면 우리는 이런 '갑질' 앞에서 그저 '불합리하다'고 비난하는 데 그칠지 모릅니다. 하지만 필자는 우리 모두가 이러한 상황에 놓였을 때, 과연 얼마나 용기 있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필자' 역시 사회생활을 하면서 마음속으로는 동의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따랐던 수많은 순간들을 기억합니다. '나 하나쯤이야' 혹은 '모두가 하는데 나만 안 할 수 있나' 같은 생각에 휩싸여 침묵했던 경험이 없는 사람은 아마 드물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적 전염'의 고리는 개개인의 작은 침묵들이 모여 단단해집니다. 이러한 '사회적 전염'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개개인의 '용기 있는 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의 목소리가 고립되지 않도록 사회적 지지 체계가 작동해야 합니다. 이번 사건을 공론화한 '사회복지종사자 권익지원센터'와 같은 기관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우리' 사회가 건강해지려면, 불합리한 상황 앞에서 주저앉거나 휩쓸려 가는 대신, 서로의 '정체성 경제'를 존중하고 '감정노동'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지금,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울고 있는 누군가를 본다면, 그 웃음의 의미를 다시 한 번 헤아려봐야 할 것입니다.
침묵이 아닌 용기가 '우리'를 지키는 힘입니다.
경향 문화

완벽주의 셰프의 실수, 왜 위로가 될까?

완벽주의 셰프의 실수, 왜 위로가 될까?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셰프들이 해외 식당에서 막내로 일하며 온갖 실수를 저지르는 모습이 담긴 한 예능 프로그램이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시청자들은 완벽할 것 같았던 그들이 서투르고 당황하는 모습에 열광하며 '인간적이다', '나 같아서 더 재밌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필자는 이 현상에서 '완벽주의'에 대한 우리 사회의 복합적인 시선과 '회복탄력성'의 가치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완벽주의'는 어떤 일을 완벽하게 수행하려는 성향을 말합니다. 이는 때로는 탁월한 성과를 이끌어내는 동기가 되지만, 동시에 실패에 대한 극심한 두려움과 자기 비판으로 이어져 정신 건강에 해를 끼치기도 합니다. 심리학자 데이비드 번즈(David Burns)는 완벽주의가 오히려 '성공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실수 없는 완벽한 모습을 연출하려 애쓰지만, 오히려 그 완벽함이 타인과의 진정한 연결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셰프들은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거장들입니다. 그들은 아마도 오랜 시간 동안 완벽함을 추구하며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방송에서 그들은 낯선 환경에 던져져 '막내'라는 새로운 라벨을 달고, 서툰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줍니다. 이 '라벨링'은 그들의 기존 정체성에 균열을 내지만, 동시에 새로운 모습으로 대중에게 다가갈 기회를 제공합니다. 시청자들이 열광하는 지점은 바로 이 '불완전한 완벽주의'에 있습니다. 우리는 완벽한 사람에게서 영감을 받지만, 정작 위로를 받는 것은 실수하고 넘어지는 모습에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매 순간 실수하고 부족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셰프들의 실패는 그들의 완벽주의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회복탄력성'을 보여주는 계기가 됩니다. '회복탄력성'은 역경과 시련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마음의 근력을 의미합니다. 낯선 주방에서 혼나고, 실수하고, 당황하지만 이내 다시 칼을 잡고 요리에 집중하는 셰프들의 모습은 시청자들에게 '나도 저럴 수 있다'는 공감과 희망을 전합니다. 이들은 단순히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를 통해 배우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자기충족적 예언'의 긍정적인 반전을 만듭니다. '막내는 서툴다'는 라벨이 붙었지만, 이들은 그 안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보입니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 완벽함을 강요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필자 역시 완벽주의의 덫에 걸려 스스로를 괴롭힌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셰프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실패해도 괜찮아'라는 따뜻한 위로를 건넵니다. 오히려 그 실패가 당신을 더 인간답고 매력적인 존재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듯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진정으로 보고 싶어 했던 것은 '실수하지 않는 신'이 아니라, 실수해도 다시 일어설 줄 아는 '진정한 인간'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당신이 지금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다면, 잠시 멈춰 서서 당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힘을 발견하는 건 어떨까요?
실수해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모두 성장하는 중이니까요.
경향 사회

‘51억 키오스크’, 왜 외면받을까?

‘51억 키오스크’, 왜 외면받을까?
51억 원이라는 막대한 예산이 투입된 비대면 진료 키오스크 '섬 닥터'가 섬마을 노인들의 외면 속에 비닐도 뜯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다는 소식은 우리에게 씁쓸한 질문을 던집니다. '왜 이렇게 좋은 의도가 담긴 기술이 현장에서 작동하지 않을까?' 필자는 이 기사를 읽으며 '귀인 오류'와 '습관 형성과 보상회로'라는 심리학적 개념이 떠올랐습니다. '귀인 오류'는 어떤 사건의 원인을 판단할 때, 상황적 요인보다 개인의 특성이나 의지에 더 큰 비중을 두는 경향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키오스크가 사용되지 않는 이유를 '노인들이 게을러서', '새로운 것을 배우기 싫어해서'라고 단정 짓는 것이 대표적인 귀인 오류입니다. 물론 개인의 성향도 중요하지만, 필자는 이면에 깔린 복합적인 요인들을 함께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노인들에게는 익숙지 않은 기기 조작 방식, 비대면 진료에 대한 낮은 신뢰도,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이 주는 따뜻한 위로와 교류의 부재 등 다양한 상황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무리 첨단 기술이라도 사용자의 필요와 맥락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그저 값비싼 고철 덩어리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또한, 새로운 기술의 도입은 '습관 형성과 보상회로'라는 측면에서도 접근해야 합니다. 우리의 행동은 종종 보상에 의해 강화되고 습관으로 자리 잡습니다. 키오스크 사용이 주민들에게 어떤 긍정적인 '보상'을 제공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익숙한 육지 병원 방문이나, 한 달에 한 번 찾아오는 '병원선'의 의료진과의 대면 진료는 그 자체로 '따뜻한 보상'을 제공합니다. 의사와 눈을 맞추고, 손을 잡고, 긴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노인들은 단순한 진료를 넘어선 정서적 만족감을 얻습니다. 하지만 키오스크는 이러한 '보상회로'를 충분히 자극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화면 너머의 낯선 의사와 짧게 대화하고, 기계적인 절차를 거치는 과정은 '우리'에게 익숙한 인간적인 교류에서 오는 안정감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복잡한 조작은 좌절감이라는 '부정적인 보상'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필자 역시 나이가 들면서 복잡한 기기 앞에서 한숨을 쉬거나,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이걸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하는 불평은 사실 '나는 왜 이걸 못 할까?' 하는 불안감의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히 기술 도입의 실패를 넘어, '정체성 경제'의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섬마을 노인들에게 의료 서비스는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자,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최소한의 권리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을 위한 기술이 너무 어렵거나 비인간적이라면, 이는 '나는 사회에서 소외된 존재인가?'라는 정체성의 위협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기술은 인간을 이롭게 해야 하지만, 때로는 인간을 소외시키기도 합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기술의 발전만큼이나 중요한 '사람에 대한 이해'입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혁신을 계획하고 있다면, 그 혁신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그리고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깊이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첨단 기술이 닿지 않는 곳에 사람의 온기가 닿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 먼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