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라는 선택, 자기결정성의 상실

밀양의 유일한 분만 병원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은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듯해 마음이 아픕니다. 40년간 한 지역의 생명을 책임져온 두 분의 의료진, 그들의 마지막 선택은 ‘포기’였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필자는 문득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는 대체 언제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결정을 내리는 걸까? 어쩌면 우리의 삶 속에서도 이와 비슷한 ‘포기’의 순간들이 찾아오곤 하지 않을까요.
두 분의 의료진이 겪었을 심리적 고통은 단순히 육체적인 피로를 넘어섰을 것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번아웃’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번아웃은 1970년대 미국의 정신과 의사 허버트 프루덴버그(Herbert Freudenberger)가 처음 사용한 용어로, 주로 과도한 업무와 스트레스로 인해 에너지가 고갈되고, 냉소적이며 비인간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특히 타인을 돕는 직업군에서 많이 나타나는데, 이들은 자신의 노력이 무의미하다고 느끼거나, 더 이상 타인에게 공감할 수 없게 되는 '정서적 고갈'을 경험하게 됩니다. 밀양의 두 의료진 역시 끊임없이 생명을 살리는 고귀한 일을 해왔지만, 아마도 인력 부족과 만성 적자라는 현실 앞에서 깊은 무력감과 함께 정서적 고갈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젠 포기'라는 말 속에는 지난 40년간의 헌신과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현실 사이의 처절한 갈등이 담겨 있는 듯합니다.
이러한 상황은 ‘자기결정이론’의 관점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심리학자 에드워드 데시(Edward Deci)와 리처드 라이언(Richard Ryan)이 제시한 자기결정이론은 인간이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려는 타고난 경향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세 가지 기본적인 심리적 욕구가 충족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세 가지는 바로 '자율성(autonomy)', '유능감(competence)', 그리고 '관계성(relatedness)'입니다. 자율성은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고 싶어 하는 욕구, 유능감은 어떤 일을 효과적으로 해내고 싶어 하는 욕구, 관계성은 타인과 의미 있는 연결을 맺고 싶어 하는 욕구를 의미합니다.
밀양의 의료진은 처음 이 병원을 열었을 때 분명 높은 자율성과 유능감, 그리고 지역 사회와의 깊은 관계성을 느끼며 시작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젊은 의사들은 오지 않고, 출생아 수는 줄어들어 병원은 만성 적자에 시달립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병원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은 그들의 '유능감'을 훼손했을 것입니다. 또한, 더 이상 병원을 운영할 수 없다는 결정은 '자율성'의 상실로 이어집니다. 그들이 원했든 원치 않았든, 현실의 벽에 부딪혀 결국 '포기'라는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역 주민들과의 '관계성' 또한 그들을 붙잡았겠지만, 그 관계성만으로는 현실적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영화 '아름다운 인생'에서 평생을 헌신했던 주인공이 결국 삶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모든 것을 내려놓는 모습처럼, 이분들의 '포기'는 어쩌면 더 이상 외부적인 지원 없이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이 세 가지 핵심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게 된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도, 혹은 아무리 사랑하는 관계라도, 우리의 자율성, 유능감, 관계성이 지속적으로 위협받는다면 우리는 결국 ‘포기’를 선택하게 될 수 있습니다. 이는 개인의 나약함이 아니라, 인간이 지닌 기본적인 심리적 욕구가 충족되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반응일 수 있습니다. 필자 역시 상담 현장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 상황에 부딪힐 때면 깊은 좌절감에 빠지곤 합니다. 그때마다 '내가 정말 잘하고 있는 걸까?'라는 의문이 들고, '이대로 계속하는 것이 맞을까?' 하는 고민에 휩싸입니다. 그런 순간들이 바로 우리의 '자기결정성'이 흔들리는 지점일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이 왜 이 일을 하는지, 무엇을 위해 관계를 이어가는지, 그 바탕에 있는 '자율성', '유능감', '관계성'이라는 세 가지 기둥이 여전히 튼튼한지 한번쯤 돌아봐야 합니다. 만약 이 기둥들이 위태롭다면, 우리의 마음은 언제든 '포기'라는 선택지에 다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의 마음을 돌보는 것은 결코 이기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둘러싼 많은 것들을 지속 가능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노력일 것입니다.
당신의 '포기'는 어쩌면 새로운 시작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