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마음 연구소 · my-mind.kr진성오 박사 칼럼

THE MIND GAZETTE

임상심리학자가 바라보는 오늘의 뉴스

2026년 8월 19일 수요일
발행 2026-08-18
한겨레 사회

모욕과 침묵, '인지부조화'의 덫

모욕과 침묵, '인지부조화'의 덫
임상심리학자 진성오입니다. 마른 먹태가 누군가의 뺨을 후려치는 소리, 그리고 그 소리를 삼킨 짙은 침묵. 최근 보도를 통해 뒤늦게 알려진 한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의 풍경입니다. 검찰의 칼날이 겨누어지고 나서야 '괴롭힘'이라는 이름표를 겨우 붙일 수 있었다는 사실은, 단순한 분노를 넘어 서늘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 자리에 있던 수많은 눈과 귀는 왜 스스로를 봉인했을까요? 그것은 단순한 비겁함이었을까요, 아니면 우리 내면의 더 복잡하고 교묘한 심리적 방어기제가 작동한 결과일까요? 이 침묵의 연대기를 접하며, 저는 한 가지 고전적인 사회심리학 실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로 1964년 뉴욕을 충격에 빠뜨린 ‘키티 제노비스 사건’입니다. 한 여성이 30분 넘게 살해당하는 동안 38명의 목격자 중 누구도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 사건은, 도시의 비정함으로 치부되었죠. 하지만 심리학자 빕 라타네(Bibb Latané)와 존 달리(John Darley)는 다른 질문을 던졌습니다. ‘목격자가 많았기 때문에’ 아무도 돕지 않은 것은 아닐까? 이것이 바로 ‘방관자 효과(Bystander Effect)’의 시작입니다. 그들은 실험을 통해 ‘책임감 분산(Diffusion of Responsibility)’이라는 개념을 증명했습니다. 위급 상황에 목격자가 나 혼자일 때는 돕지 않은 책임이 100% 나에게 오지만, 여러 명일 경우 ‘누군가 다른 사람이 하겠지’라며 그 책임감이 1/n로 흩어진다는 겁니다. 여기에 ‘다원적 무지(Pluralistic Ignorance)’가 더해집니다.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는 상황에서, 우리는 서로의 눈치를 보며 ‘다른 사람들이 가만히 있는 걸 보니 별일 아닌가 보다’라고 상황을 오판하게 됩니다.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고도 아무 말 못 하는 군중처럼, 모두가 속으로는 ‘이건 잘못됐어’라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침묵함으로써 ‘이건 괜찮은 일’이라는 암묵적 합의를 만들어내는 것이죠. ‘먹태 사건’의 동료들 역시 이 두 가지 심리적 안개 속에서 길을 잃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누군가 말리겠지’, ‘다들 가만히 있는데 나만 나서는 게 이상한 건가?’ 하는 생각들이 뒤엉켜 결국 모두의 입을 막아버린 것은 아니었을까요?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우리는 더욱 교활한 자기기만과 마주하게 됩니다. 바로 레온 페스팅거(Leon Festinger)가 1957년에 주창한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 이론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신념과 행동이 충돌할 때 발생하는 극심한 심리적 불편함을 견디지 못합니다. 이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우리는 행동을 바꾸기보다, 더 쉬운 길인 ‘생각’을 바꾸는 쪽을 택하곤 합니다. 이솝 우화 속 여우는 높이 달린 포도를 따지 못하자 ‘저 포도는 분명 실 거야’라며 자신의 실패를 합리화합니다. 이것이 인지부조화 해결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입니다. 직장 내 괴롭힘을 목격한 동료들의 마음속을 들여다볼까요? ‘동료를 돕는 것은 옳다’는 신념과 ‘나서지 않고 침묵했다’는 행동 사이에는 거대한 균열이 생깁니다. 이 고통스러운 부조화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의 뇌는 놀라운 창의력을 발휘합니다. ‘피해자가 맞을 만한 짓을 했겠지’, ‘원래 저 둘은 저렇게 노는 사이야’, ‘사회생활이 다 그런 거지, 별일 아니야’라며 상황의 의미를 축소하거나, ‘내가 나선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괜히 나만 찍힐 뿐이야’라며 자신의 무력함을 정당화하는 것이죠. 심지어 가해자조차 자신의 행동을 ‘군기를 잡기 위한 훈육’ 혹은 ‘친밀감의 표현’으로 포장하며 스스로를 기만합니다. 이처럼 인지부조화는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게 만드는 ‘안락한 함정’이 됩니다. 진실을 바꾸는 고통보다, 내 생각을 바꾸는 편안함을 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리적 기제들은 위계질서가 명확하고 생존 경쟁이 치열한 ‘직장’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침묵은 단순한 방관이 아니라, 때로는 가장 현실적인 ‘생존 전략’으로 둔갑합니다. 하지만 그 전략이 정말 우리를 지켜줄까요? 2차 세계대전 당시, 수많은 평범한 독일인들이 나치의 만행에 침묵하거나 동조했던 역사를 되짚어 봅니다. 그들 대부분은 악마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명령에 따랐을 뿐’이고, ‘남들도 다 그렇게 했으며’, ‘유대인들은 우리와 다르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인지부조화를 해소했던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작은 침묵과 자기 합리화가 모여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비극을 만들어냈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임상심리학자인 저 역시 수많은 내담자의 고통을 마주하면서도, 정작 제 삶의 불편한 순간들 앞에서는 침묵하고 싶었던 적이 왜 없었겠습니까. ‘굳이 내가 아니어도…’라는 책임감 분산의 속삭임과 ‘이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라는 인지부조화의 달콤한 유혹을 느껴본 적이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그 침묵이 주는 순간의 안도가 실은 내일의 더 큰 괴물을 키우는 자양분이라는 역설을 경고하고 싶습니다. 침묵은 전염되고, 왜곡된 합리화는 조직의 건강한 세포를 서서히 파괴합니다. 외부의 강력한 개입이 있고 나서야 겨우 진실이 드러나는 사회는, 이미 자정 능력을 상실했다는 위험 신호일지 모릅니다. 거창한 영웅이 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만 스스로에게 묻는 것을 멈추지 말자는 제안입니다. ‘지금 나의 침묵은 나를 지키는 지혜인가, 아니면 나 자신을 속이는 기만인가?’ 그 질문을 시작하는 작은 용기, 그것이 바로 우리 안의 방관자와 여우를 몰아내고, 병든 침묵의 연대를 끊어내는 첫걸음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당신의 침묵은 안락한가, 혹은 위험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