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번역가의 '정체성 경제학'
최근 한 매체에서는 'AI보다 잘 번역할 수 있나 묻지 말라'는 번역가들의 목소리를 전하며, 인공지능 번역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렸습니다. 지난해 '딸깍 출판'에 이어 올해는 '딸깍 번역'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하며, 인간의 고유한 영역이라 여겨졌던 창작과 해석의 경계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필자는 이 소식을 접하며, 비단 번역가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왜 어떤 일에 그토록 매달리고, 그 일이 주는 만족감 속에서 '나'를 찾아가는 것일까요?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임상심리학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정체성 경제'라는 개념으로 설명해볼 수 있습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 아커로프와 레이첼 크랜튼 교수가 제시한 '정체성 경제학'은 인간이 합리적인 경제적 선택만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정체성'을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 때로는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선택도 서슴지 않는다는 관점을 제시합니다. 우리에게 일은 단순한 생계 수단을 넘어,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번역가에게 번역은 단순히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기술적 작업이 아닙니다. 원작의 문화적 맥락을 이해하고, 작가의 숨은 의도를 파악하며, 독자에게 가장 적절한 언어로 재창조하는 과정 속에서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강화합니다. AI가 아무리 빠르고 정확하게 언어를 치환한다 해도, 그 안에 '번역가'라는 한 인간의 고유한 해석과 영혼이 녹아들기는 어렵다고 우리는 느끼는 듯합니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복제 인간들이 인간과 자신들의 정체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처럼, AI 시대의 번역가들은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끊임없이 질문받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복잡한 심리 상태를 경험합니다. 바로 '인지부조화'입니다. 인지부조화는 사회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가 제시한 개념으로, 어떤 두 가지 신념이나 행동, 또는 신념과 행동이 서로 모순될 때 개인이 경험하는 불편한 심리 상태를 말합니다. AI 번역이 주는 압도적인 효율성과 편리함 앞에서 우리는 찬사를 보냅니다. '딸깍' 한 번이면 수십 페이지의 번역이 순식간에 이루어지니, 얼마나 매력적인가요?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라는 신념을 놓지 못합니다. AI가 번역한 책을 싸게 구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진정한' 문학 작품은 인간의 섬세한 손길을 거쳐야 한다고 믿는 이중적인 태도가 바로 인지부조화의 한 예일 것입니다. 필자 역시 AI의 도움을 받아 정보의 바다를 탐색하는 편리함을 누리면서도, 동시에 인간적인 대화와 교류가 줄어드는 것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 불편함은 우리 내면에서 '효율성'과 '인간적 가치'라는 두 가지 중요한 신념이 충돌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AI의 발전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무조건적인 배척만이 답일까요? 아니면 무비판적인 수용이 답일까요? 아마도 우리는 '인간 고유의 영역'을 재정의하고, AI와의 '공존' 방식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번역가에게 'AI보다 잘 번역할 수 있나' 묻기보다, '당신만이 할 수 있는 번역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할 때인지도 모릅니다. AI는 강력한 도구이지만, 그 도구를 통해 어떤 가치를 창출하고, 어떤 '정체성'을 지켜나갈지는 여전히 우리의 몫입니다.
AI 시대, 나의 '고유한 가치'를 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