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속, 흔들리지 않는 삶의 이유
네팔 카트만두를 덮친 대홍수 소식은 우리에게 깊은 안타까움을 안겨줍니다. 삶의 터전을 잃고 망연자실한 순간에도, 수많은 네팔 시민들이 스와얌부나트 불교 사원으로 향해 끝없이 탑돌이를 하며 가족의 안녕을 빌고 있다는 보도는 필자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엄청난 재난 앞에서 혼돈과 절망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텐데, 이들은 어떻게 다시 일어설 힘을 찾으려 하는 걸까요? 아마도 그들은 절망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고, 마음의 근육을 단련하는 법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듯합니다.
필자는 이들이 보여주는 모습에서 '회복탄력성'이라는 심리학 개념을 떠올렸습니다. 회복탄력성이란 역경과 시련, 고난을 겪었을 때 이를 극복하고 더 나아가 성장하는 힘을 뜻합니다. 단순히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넘어, 고통을 통해 더 단단해지고 지혜로워지는 능력이랄까요. 이 개념은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이자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빅터 프랭클의 삶과 사상에서 깊은 울림을 얻습니다. 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라는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인간이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를 잃지 않는 한 절망하지 않는다는 '로고테라피'를 주창했습니다. 즉, 고통을 피할 수 없다면 그 고통 속에서 의미를 찾으라는 것이지요. 네팔 시민들이 신에게 간절히 매달리는 모습은 어쩌면 삶의 통제권을 잃은 상황에서 다시금 '의미'를 부여하려는 인간 본연의 투쟁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크고 작은 어려움에 부딪힙니다. 때로는 감당하기 힘든 거대한 파도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아마도 많은 이들이 혼자만의 동굴로 숨어들거나, 현실을 부정하려 할 것입니다. 하지만 네팔의 이재민들은 홀로 슬픔을 감당하기보다 함께 모여 기도합니다. 이 집단적인 의례는 단순한 종교 행위를 넘어선 '사회적 지지'의 강력한 표현입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사회적 유대가 약화될 때 사람들이 더 큰 고통을 겪는다고 보았습니다. 반대로, 공동체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느낄 때, 우리는 훨씬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함께 기도하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희망을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고통은 공동체의 연대로 승화되는 것이지요.
필자 역시 개인적인 어려움을 겪었을 때,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다 더 깊은 수렁에 빠졌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고, 그 손을 잡았을 때 비로소 비로소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보았습니다. '나 혼자가 아니구나'라는 깨달음은 생각보다 훨씬 강력한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험한 산을 오를 때 혼자서는 금방 지치지만, 동행자가 있다면 서로 의지하며 더 높이 오를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네팔 시민들이 사원에 모여 탑돌이를 하는 모습은, 서로의 존재 자체가 서로에게 '안전 기지'가 되어주는 동시에, 다시 살아갈 '삶의 이유'를 상기시켜주는 숭고한 행위인 듯합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대한 재난을 피하는 요행이 아니라, 어떤 재난이 닥쳐도 꺾이지 않는 '마음의 근육'을 키우는 일일 것입니다. 그 근육은 혼자서만 키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라는 이름의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지지하고 격려하며 단련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때로는 고통 속에서 가장 깊은 의미를 발견하고, 가장 큰 희망을 찾아내는 것이 인간의 위대한 능력이니까요.
우리도 혹시 모를 삶의 폭풍우 앞에서, 나만의 '마음의 근육'을 어떻게 단련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할 때입니다.
절망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는 힘, 우리 안에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