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마음 연구소 · my-mind.kr진성오 박사 칼럼

THE MIND GAZETTE

임상심리학자가 바라보는 오늘의 뉴스

2026년 9월 8일 화요일
발행 2026-09-07
경향 라이프

'남자다움'이라는 가면 뒤 숨겨진 고통

최근 한 기사는 직장인 김모씨(54)가 겪는 의욕 상실과 무기력감을 조명했습니다. 그는 평소 꾸준히 하던 운동도 즐기지 못할 정도로 심한 우울감에 시달렸고, 업무 집중력도 떨어져 익숙한 작업조차 재확인해야 할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이 모든 증상은 남성 갱년기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그는 ‘남성’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고통을 제대로 인식하고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필자는 이 기사를 읽으며 오랜 시간 우리 사회에 뿌리 박힌 한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우리는 왜 남성의 취약함을 인정하는 데 이토록 인색할까요? 아마도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강한 남성'이라는 이상적인 틀 때문일 것입니다. 남성은 언제나 강하고, 감정적이지 않으며, 흔들림 없이 가정을 이끌어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라벨링'이 존재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처럼 특정 집단이나 개인에게 사회적으로 부여되는 특성이나 역할을 '라벨링'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러한 라벨링은 종종 '자기충족적 예언'으로 이어지곤 합니다. 사회가 '남자는 갱년기를 겪지 않는다'거나 '남자는 약한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고 암묵적으로 라벨을 붙이면, 남성들은 실제로 자신의 신체적, 심리적 변화를 갱년기로 인지하지 못하거나, 설령 인지하더라도 이를 표현하는 것을 주저하게 됩니다. 이는 스스로 자신의 경험을 부정하고, 필요한 도움을 찾지 못하게 만드는 악순환을 낳습니다. 필자가 상담실에서 만났던 한 남성 내담자분도 그랬습니다. 그는 늘 '가장의 무게'를 이야기하며 자신의 피로와 우울감을 '그저 힘든 일상'으로 치부했습니다. 밤에 잠 못 이루고, 아침에는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지만, '남자라면 이 정도는 참아야지'라는 말로 스스로를 다그쳤습니다. 심지어 아내가 '혹시 갱년기 아니냐'고 조심스럽게 물었을 때조차, 그는 '여자들이나 겪는 거지, 내가 무슨 갱년기냐'며 강하게 부정했다고 합니다. 그의 모습은 마치 자신의 감정을 투명한 방벽 안에 가두고 외부와 단절시키는 듯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감정노동'이라는 개념과도 연결됩니다. 감정노동은 실제 자신의 감정과는 다른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직업적 상황에서 주로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하지만 넓게 보면, 우리 모두는 사회적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내면의 감정을 억누르고 특정 감정을 연기하는 '감정노동'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남성들에게 '강인함'과 '무감각함'을 요구하는 사회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취약함과 슬픔, 무기력감을 숨기고 '괜찮은 척'하는 고된 감정노동을 강요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마치 셰익스피어의 비극에서 주인공이 운명 앞에서 고뇌하면서도 겉으로는 흔들림 없는 모습을 유지하려는 것과 비슷합니다. 내면의 폭풍우와 씨름하면서도, 외부에는 잔잔한 호수처럼 보이려 애쓰는 것이지요. 이러한 감정노동은 정신적 에너지를 크게 소모하고, 결국에는 우울감이나 불안감, 신체적 증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김모씨의 사례처럼, 신체 호르몬의 변화가 시작되는 중년 남성들에게 사회적 라벨링과 감정노동의 굴레는 더욱 가혹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고통을 '개인의 나약함'으로 해석하며 자책하거나, 아예 무시해버리다가 병을 키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강인함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어깨에 얼마나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있었던 것일까요?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 사회가 남성의 '취약함'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남성 갱년기'라는 단어 자체를 금기시하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생애 주기 중 하나로 받아들이고, 이에 대한 열린 대화를 시작해야 합니다. 남성 스스로도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남자다움'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마주할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자기결정'이며, 스스로의 건강한 삶을 위한 첫걸음일 것입니다. 필자 역시 한때 '박사니까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무언의 라벨링에 갇혀, 나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을 어려워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부족함을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남성 갱년기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남성'이라는 틀에 갇혀 자신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의 취약함을 인정하고 보듬어줄 때, 비로소 더 건강하고 따뜻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외면하는 것은 용기가 아님을 기억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