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마음 연구소 · my-mind.kr진성오 박사 칼럼

THE MIND GAZETTE

임상심리학자가 바라보는 오늘의 뉴스

2026년 9월 11일 금요일
발행 2026-09-10
경향 문화

'엄마는 사라지지 않기 위해 사라진 걸까', 그 질문에 담긴 마음

한 그림책의 이야기가 많은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습니다. '엄마가 도망갔다'는 제목처럼, 만화 속 엄마는 전속력으로 달려 나가고, 아이는 멍한 아빠와 함께 엄마를 찾아 나섭니다. 아이가 기억하는 엄마의 힌트는 “유일한 쉴 곳”이라던 카페, “좋은 기운을 얻는다”는 산, “파도가 밀려가고 밀려오는 것만 봐도 마음이 좋아진다”는 바다였습니다. 필자는 이 기사를 읽으며 문득 이런 질문을 던져보게 됩니다. 과연 이 엄마는 '사라진' 것일까요, 아니면 '사라지지 않기 위해' 잠시 멈춰 선 것일까요.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역할을 맡습니다. 자녀, 학생, 직장인, 그리고 배우자나 부모처럼 말이지요. 그중에서도 '엄마'라는 역할은 유독 희생과 헌신이라는 무거운 짐을 동반하는 듯합니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과정에서 한 여성은 '나'라는 개인의 정체성보다 '엄마'라는 역할 정체성에 압도당하기 쉽습니다. 데시(Deci)와 라이언(Ryan)이 제시한 '자기결정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세 가지 심리적 기본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려는 '자율성(autonomy)', 유능하고 효과적이고 싶은 '유능감(competence)', 그리고 타인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고 싶은 '관계성(relatedness)'이지요. 이 세 가지 욕구가 충족될 때 우리는 비로소 내적으로 동기 부여되고, 삶의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엄마'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많은 여성에게 이 '자율성'은 종종 위협받곤 합니다. 아이의 스케줄에 맞춰 모든 일상이 재편되고, 내 몸과 마음의 주인이 '나'가 아닌 '아이'가 되는 경험은 흔합니다. 내가 무엇을 먹고 싶은지, 어디로 가고 싶은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묻기 전에 아이의 필요가 먼저 채워져야 합니다. 한때는 스스로의 삶의 키를 쥐고 거친 파도를 헤쳐나갔던 배가, 어느 순간부터는 거대한 짐을 실은 채 방향타 없이 떠밀려가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아이와의 깊은 '관계성'에서 오는 행복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지만, 동시에 '나'라는 존재의 '자율성'이 침해당하는 경험은 내면의 고갈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율성의 상실은 결국 '정체성'의 혼란으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저명한 발달심리학자 에릭 에릭슨(Erik Erikson)은 인간의 생애 주기에 걸쳐 '정체성 위기(identity crisis)'를 겪는다고 설명했습니다. 특히 청소년기에 '나는 누구인가'를 탐색하는 시기가 중요하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새로운 역할과 환경에 직면할 때마다 정체성의 재정립이 필요합니다. '엄마'가 되는 것은 한 개인에게 가장 강력하고 근본적인 정체성 변화 중 하나일 것입니다. 한때는 특정 직업인, 특정 취미를 가진 사람, 특정 꿈을 꾸던 사람이었지만, 거울 속에는 오직 '아이의 엄마'만이 비치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합니다. 마치 카멜레온이 주변 환경에 맞춰 색을 바꾸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자신의 본래 색을 잊어버린 것처럼 말입니다. 나의 이름, 나의 욕구, 나의 꿈이 '엄마'라는 거대한 역할 뒤에 가려져 버리는 순간, 우리는 '나는 과연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림책 속 엄마가 찾아간 카페, 산, 바다는 어쩌면 '엄마'라는 역할로부터 잠시 벗어나 '나'라는 개인의 자율성을 되찾고, 잃어버린 정체성의 조각을 다시 맞추려는 시도였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아이를 '버리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사라져 버리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자신을 붙잡는 과정이었을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종종 엄마들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는 '완벽한 희생'을 강요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엄마도 인간이며, 자신의 심리적 기본 욕구를 충족시키고 정체성을 유지해야만 건강하고 행복한 돌봄을 지속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의 존재감을 잃어버린 엄마는 결국 아이에게도 온전한 사랑을 주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어쩌면 '사라짐'은 '다시 채워짐'을 위한 용기 있는 선택일 수 있습니다. 필자 역시 육아의 틈바구니에서 '나는 누구였더라?' 하는 질문이 맴돌 때가 있었습니다. 잠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만의 공간에서 숨을 고르던 순간, 비로소 '나'의 빛깔을 다시 찾아갈 수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 모두 각자의 '엄마'를, 그리고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잠시 멈춰 서서 스스로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그것이 사라지지 않기 위한 가장 중요한 발걸음이 아닐까요.
자기 안의 '나'를 돌보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