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마음 연구소 · my-mind.kr진성오 박사 칼럼

THE MIND GAZETTE

임상심리학자가 바라보는 오늘의 뉴스

2026년 9월 14일 월요일
발행 2026-09-13
한겨레 사회

‘눈치작전’과 믿음의 배신

대학 수시 원서접수 마감 직전, 전국 수험생들을 혼란에 빠뜨린 전산장애 사태가 있었습니다. 접수 완료를 눈앞에 둔 수험생 최대 1200여 명이 애써 준비한 원서를 제출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수십 년간 쌓아온 노력이 한순간의 시스템 오류로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한 학생들의 좌절감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필자는 이 사건에서 우리 사회의 독특한 '눈치작전' 문화, 그리고 그 이면에 숨겨진 인간 심리의 한 단면을 보게 됩니다. 이른바 '눈치작전'은 수험생들이 최종 경쟁률을 보고 가장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학과에 막판 지원하는 전략을 말합니다. 이는 얼핏 합리적인 선택처럼 보이지만, 사실 우리 마음속 깊이 자리한 '인지적 구두쇠'의 발현일 수 있습니다. '인지적 구두쇠'란 스탠퍼드 대학교의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과 아모스 트버스키가 제시한 개념으로, 인간은 인지적 에너지를 아끼려는 경향이 있어 복잡한 상황에서 단순한 지름길을 택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모든 정보를 심도 있게 분석하기보다, 빠르고 쉽게 결론에 도달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뜻입니다. 수많은 학과 중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곳을 찾아 오랜 시간 고민하고 준비하기보다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경쟁률'이라는 단순한 지표에 의존해 막판에 몰리는 현상이 바로 인지적 구두쇠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마치 주식 시장에서 '묻지마 투자'를 하거나, 남들이 좋다고 하는 식당에 줄을 서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다고 믿을까요? 아니면 그저 남들이 가는 길을 따라가며 안심하려는 것일까요? 아마도 후자에 가까울 듯합니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우리는 남들의 행동을 통해 '사회적 증거'를 찾으려 애쓰고, 이는 결국 집단적 동조 현상을 낳습니다. 여기에 또 다른 심리적 기제가 작동하는데, 바로 '확증편향'입니다. 확증편향은 피터 왓슨과 같은 학자들의 연구에서 잘 드러나듯이, 자신의 기존 신념이나 가설을 뒷받침하는 정보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정보는 무시하는 경향을 말합니다. 막판 경쟁률을 보고 특정 학과에 지원하기로 결정한 학생은, 그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할 정보(예를 들어, '경쟁률이 낮으니 합격 가능성이 높다'는 기대나, '다른 친구들도 이렇게 한다'는 사실)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자신의 결정에 대한 불안감을 줄이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는 정보를 찾게 되는 것이지요. 불확실한 상황에서 우리는 더욱더 자신의 결정을 확신하려 애쓰는 듯합니다. 이러한 심리적 기제가 작동하는 상황에서 시스템 '먹통'은 단순한 기술적 오류를 넘어, 학생들의 심리에 큰 타격을 줍니다. 필자가 보기에, 이는 단순히 원서 접수 기회를 박탈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선택과 노력이 '무의미해졌다'는 깊은 무력감을 안겨줄 수 있습니다. 최적의 선택을 했다고 믿었던 '눈치작전'이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가면서, 학생들은 자신의 판단에 대한 불신과 함께, 시스템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는 단순히 대학 입시의 실패를 넘어, 미래에 대한 계획과 통제감을 상실하는 경험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늘 '최적의 선택'을 강요하고, '눈치'를 통해 유리한 고지를 점하라고 부추기는 듯합니다. 하지만 이번 사태는 우리가 맹목적으로 따랐던 '눈치'와 시스템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어쩌면 우리는 외부의 경쟁률이나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선택하고 그 선택을 묵묵히 밀고 나가는 용기가 더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결과가 어떻든, 스스로의 판단에 대한 신뢰는 그 어떤 외부 요인보다 단단한 마음의 근육을 만들어 줄 테니까요.
예측할 수 없는 세상에서, 나만의 기준을 세울 용기가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