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마음 연구소 · my-mind.kr진성오 박사 칼럼

THE MIND GAZETTE

임상심리학자가 바라보는 오늘의 뉴스

2026년 9월 15일 화요일
발행 2026-09-14
경향 라이프

'키로 간다'는 믿음의 함정

‘어릴 때 살은 키로 간다’는 말, 한 번쯤 들어본 적 있을 겁니다. 필자도 어릴 적 통통한 친구를 보며 어른들이 건네던 위로의 말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최근 경향 라이프 기사는 이 오래된 믿음에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습니다. 소아 비만이 오히려 성조숙증을 유발해 성장을 방해하고, 지방간이나 당뇨병 같은 심각한 건강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왜 이처럼 쉽사리 틀린 정보, 혹은 단순화된 믿음을 붙들고 있을까요? 복잡한 현실 앞에서 우리 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들여다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바로 '인지적 구두쇠'라는 개념 속에서 말이지요. '인지적 구두쇠'란 무엇일까요? 이는 뇌가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정보를 처리할 때 최소한의 노력만을 들이려는 경향을 일컫는 말입니다. 사회 심리학자 수잔 피스크(Susan Fiske)와 셸리 테일러(Shelley Taylor)가 1984년에 제시한 이 개념은, 우리 뇌가 완벽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기보다는, 빠르고 효율적인 판단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마치 바쁜 직장인이 모든 서류를 꼼꼼히 검토하기보다 핵심만 훑어보고 결재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뇌는 늘 한정된 자원으로 수많은 정보를 처리해야 하니, 에너지를 아끼려는 전략을 쓰는 것이지요. 이러한 '인지적 구두쇠' 성향은 일상생활에서 여러 형태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복잡한 사회 현상을 접할 때 특정 집단에 대한 고정관념을 적용하거나, 새로운 정보를 접했을 때 기존의 믿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만 해석하곤 합니다. '어릴 때 살은 키로 간다'는 믿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이가 살이 쪘을 때 복잡한 의학적 사실이나 식단, 운동 계획을 고민하는 대신, '크면서 알아서 빠지겠지', '다 키로 갈 거야'라는 단순하고 희망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지요. 이는 부모의 불안감을 잠재우고, 당장의 불편한 진실을 회피하려는 뇌의 '구두쇠' 전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비만에 대한 인식이 지금처럼 심각하지 않던 시절, 아마도 이런 식의 위로가 보편적으로 통용되었을 것입니다. 한두 번 들었던 말이 하나의 '상식'처럼 굳어진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인지적 절약은 때로 큰 대가를 치르게 할 수 있습니다. 소아 비만이 성조숙증으로 이어져 성인이 되었을 때 키가 더 작아질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지방간, 당뇨병 같은 만성 질환의 위험을 높인다는 의학적 경고는 '인지적 구두쇠'가 가져올 수 있는 위험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단기적인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장기적인 건강을 담보로 잡는 셈이 됩니다. 왜 우리는 눈앞의 복잡한 진실보다 단순한 믿음에 더 쉽게 현혹될까요? 아마도 진실이 주는 불편함과 변화에 대한 부담감이 클수록, 뇌는 더 강력하게 '구두쇠' 모드로 전환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인지적 구두쇠'의 함정은 비단 건강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사회를 이해하는 방식, 타인을 판단하는 기준, 심지어 자신을 평가하는 태도에 이르기까지 우리 삶의 많은 영역에서 작동합니다. 새로운 지식이나 복잡한 상황을 접했을 때, 우리는 무심코 과거의 경험이나 주변에서 쉽게 들었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결론을 내리려 하지요. 하지만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어제의 상식이 오늘은 틀린 지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뇌가 에너지를 아끼려는 본능은 이해하지만,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는 한 번쯤 그 '구두쇠' 전략을 멈추고,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필자 역시 종종 '인지적 구두쇠'의 유혹에 넘어갈 때가 있습니다. 익숙한 방식대로 생각하고, 새로운 정보를 애써 외면하려 했던 순간들을 고백하자면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의식적인 노력으로 한 번 더 질문하고,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려 할 때 비로소 우리는 더 나은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어릴 때 살은 키로 간다'는 말 대신, 우리 아이의 건강을 위해 더 나은 '앎'을 선택하려는 용기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익숙한 믿음 뒤에 숨은 진실을 마주하는 용기, 우리에게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