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마음 연구소 · my-mind.kr진성오 박사 칼럼

THE MIND GAZETTE

임상심리학자가 바라보는 오늘의 뉴스

2026년 9월 17일 목요일
발행 2026-09-16
경향 사회

'선택의 역설', 진정한 자유를 찾아서

정부가 오랜 논의 끝에 임신중지 약물 '미프진'의 국내 도입을 결정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건강권을 보장하기 위한 중요한 진전이라는 평가와 함께, 그동안 음지에서 이루어지던 임신중지 과정이 양지로 드러나게 되었다는 점에서 많은 이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필자는 이 소식을 접하며 우리가 흔히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부르는 것의 이면에 숨겨진 복잡한 심리적 그림자들을 떠올려 봅니다. 과연 선택의 폭이 넓어지는 것은 언제나 우리를 더 행복하게 만들까요? 많은 사람은 선택의 자유가 많을수록 더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더 좋은 것을 고를 수 있는 기회가 많으니, 당연히 만족감도 커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미국의 심리학자 배리 슈워츠(Barry Schwartz)는 그의 저서 '선택의 역설(The Paradox of Choice)'에서 이 통념에 도전합니다. 그는 선택지가 너무 많아지면 오히려 결정 과정에서 심리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고, 결과적으로 불만족과 후회를 느끼기 쉽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바로 '선택의 역설'입니다. 슈퍼마켓에서 잼을 사는 상황을 상상해봅시다. 20여 가지가 넘는 잼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우리는 어떤 잼이 가장 맛있는지, 어떤 잼을 골라야 후회하지 않을지 끝없이 고민하게 됩니다. 그러다 결국 어떤 잼을 고르더라도 '혹시 다른 잼이 더 좋았을까?' 하는 미련이나 '이 잼을 고른 게 맞는 선택이었을까?' 하는 후회를 느끼기 쉽습니다. 반대로, 잼의 종류가 서너 가지에 불과하다면 고민의 깊이도 줄어들고, 선택에 대한 만족감도 비교적 높아지는 경향을 보입니다. 임신중지라는 중대한 결정은 잼을 고르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무게를 지닙니다. 약물 도입으로 선택의 한 가지 길이 더 열렸지만, 이 길을 택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겪게 될 수많은 감정적 갈등은 여전히 오롯이 개인의 몫으로 남게 됩니다. 물론 약물 도입은 여성의 '자기결정성'을 존중하는 중요한 조치입니다. 심리학자 데시와 라이언(Deci & Ryan)이 주창한 '자기결정성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스스로의 삶을 통제하고 주도하려는 내재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자율성, 유능감, 관계성이라는 세 가지 심리적 욕구로 구성되는데, 특히 자율성은 자신의 선택에 대한 주인의식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임신중지 약물 도입은 여성들이 자신의 몸과 삶에 대한 중요한 결정에서 더 많은 자율성을 행사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이는 자신의 몸에 대한 '심리적 소유감'을 강화하고, 결정 과정에서 주체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기반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자기결정성'은 단순히 선택지가 많다고 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선택을 둘러싼 사회적 지지와 정보, 그리고 다른 이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심리적 안정감이 중요합니다. 약물 도입이라는 한 걸음은 내디뎠지만, 그 선택을 하는 개인이 죄책감이나 사회적 낙인 없이 온전한 지지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는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더 많은 선택지를 제공함으로써 개인에게 더 큰 책임과 심리적 부담을 지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마치 갇힌 새에게 수많은 종류의 씨앗을 주면서도, 정작 새가 원하는 하늘을 날 자유는 주지 않은 것과 같은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는 것이지요. 필자는 이번 임신중지 약물 도입이 단순한 제도적 변화를 넘어, 우리 사회가 개인의 깊은 고뇌와 선택을 어떻게 보듬고 지지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자유는 선택의 폭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선택의 과정을 존중하고, 어떤 결과든 감당할 수 있도록 돕는 공동체의 따뜻한 시선과 연대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더 많은 선택이 더 나은 삶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선택지가 늘어나는 만큼 마음의 짐도 함께 무거워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며, 그 선택의 무게를 함께 짊어질 수 있는 따뜻한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진정한 자유란, 결국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선택하는 이의 마음에 깊이 뿌리내린 평온함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 모두가 그 평온함을 찾을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선택의 무게를 함께 나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