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마음 연구소 · my-mind.kr진성오 박사 칼럼

THE MIND GAZETTE

임상심리학자가 바라보는 오늘의 뉴스

2026년 10월 4일 일요일
발행 2026-10-03
경향 사회

그녀는 왜 임산부석을 양보하지 않았을까

그녀는 왜 임산부석을 양보하지 않았을까
최근 인터넷 커뮤니티에 영상 하나가 올라왔습니다. 발목에 깁스를 한 34주차 임산부가 지하철에 서 있고, 임산부 배려석에는 다른 여성이 앉아 있습니다. 자리를 양보해달라는 요청에 그 여성은 “나도 애 낳아봤다”고 응수했다고 합니다. 필자도 비슷한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만원 버스에서 자리를 차지한 채 잠든 척하는 학생, 노약자석에 떡하니 앉아 스마트폰에 몰두하는 젊은이. 우리는 그들을 보며 혀를 차곤 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이기적이야’라고 쉽게 단정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정말 그들은 그저 ‘나쁜 사람’일까요? 아니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요? 이 질문은 사회심리학의 오랜 화두와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행동을 설명할 때, 그 사람이 처한 ‘상황’보다는 그 사람의 ‘성격’이나 ‘기질’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를 사회심리학에서는 ‘기본적 귀인 오류(Fundamental Attribution Error)’라고 부릅니다. 어떤 행동의 원인을 찾을 때, 상황적 요인은 과소평가하고 행위자의 내적 특성은 과대평가하는 심리적 편향을 말합니다. 이 개념은 1960년대 존스와 해리스의 실험에서 명확히 드러납니다. 학생들에게 피델 카스트로를 옹호하거나 비판하는 글을 읽게 한 뒤, 글쓴이의 실제 태도를 추측하게 했죠. 놀랍게도 학생들은 글쓴이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특정 입장의 글을 쓰도록 지시받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글의 내용이 곧 글쓴이의 진짜 생각일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상황의 힘을 간과한 겁니다. 지하철의 그 여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녀를 ‘공감 능력 없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쉽게 규정합니다. 하지만 만약 그녀가 눈에 보이지 않는 질병을 앓고 있거나, 밤샘 근무로 탈진 직전이었거나, 혹은 과거 임신 시절 누구에게도 배려받지 못했던 상처가 깊이 남아있었다면 어떨까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행동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한 사람을 너무 쉽게 ‘악마화’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 여성의 마음속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요? “나도 애 낳아봤다”는 말은 어디서 나온 걸까요? 아마도 그 말은 그녀 자신의 불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한 ‘주문’이었을지 모릅니다. 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가 제시한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 이론은 이를 설명하는 좋은 틀을 제공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을 때 불편한 긴장감을 느끼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생각이나 행동 둘 중 하나를 바꾸려 합니다. 다이어트를 결심하고 5분 만에 케이크를 먹는 우리를 생각해보면 쉽습니다. ‘케이크를 먹으면 안 된다’는 믿음과 ‘케이크를 먹고 있다’는 행동 사이의 부조화. 이때 우리는 행동을 되돌릴 수 없으니 생각을 바꿉니다. ‘오늘 하루만 먹자’, ‘이건 스트레스 해소에 필요해’, ‘작은 케이크 한 조각은 괜찮아’라고 합리화하면서 말이죠. 임산부석의 여성에게도 두 가지 상충하는 인지가 있었을 겁니다. ‘몸이 불편한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사회적 규범과 ‘나는 지금 일어나고 싶지 않다’는 행동. 이 부조화를 견디기 어려웠던 그녀는 “나도 애 낳아봤다”는 새로운 생각을 추가한 것일 수 있습니다. ‘나도 너만큼 힘들었으니 지금 좀 앉아 있어도 괜찮다’는 자기 합리화를 통해 불편한 마음을 잠재우려 한 것이죠. 이는 임산부를 향한 공격이라기보다는, 사실상 자기 자신을 향한 필사적인 변명에 가깝습니다. 필자 역시 운전 중 끼어드는 차량을 향해 험한 말을 내뱉고는, 상대 운전자가 응급 환자를 태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굴을 붉힌 경험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재판관입니다. 타인의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없기에, 보이는 행동만으로 너무 쉽게 판결을 내리곤 합니다. 누군가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싶어질 때, 어쩌면 그 손가락은 내 안의 불편함과 부조화를 가리키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타인을 향한 단죄가 실은 나 자신을 향한 변명이 아닌지, 한 번쯤은 멈춰 서서 돌아볼 일입니다.
타인을 향한 비난은, 나를 향한 변명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