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무대는 내가 만든다: 자율성의 심리학

최근 스물아홉의 젊은 나이에 직접 오케스트라를 창단해 10년간 말러 교향곡 전곡 연주 프로젝트를 완주한 지휘자 진솔 씨의 이야기가 화제입니다. '불러주는 곳이 없어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자신의 무대를 직접 만들었다는 그의 고백은, 필자의 마음에도 묵직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살다 보면 우리는 종종 어떤 무대에 서고 싶지만, 정작 그 무대는 우리에게 좀처럼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좌절합니다. 원하는 역할을 맡지 못하고, 자신의 능력을 펼칠 기회를 얻지 못할 때,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아마도 많은 이들이 포기하거나, 혹은 누군가 자신을 알아주기를 기다리는 수동적인 자세를 취할 것입니다. 하지만 진솔 지휘자는 달랐습니다. 그는 스스로 무대를 만들었습니다. 이 지점이야말로 필자가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자율성'의 심리학적 깊이입니다.
심리학자 라이언(Ryan)과 데시(Deci)는 인간에게 세 가지 기본적인 심리적 욕구가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자율성', '유능감', 그리고 '관계성'입니다. 이 중 '자율성'은 스스로 선택하고, 자신의 행동을 통제하며, 그 과정에서 주체성을 느끼고 싶은 욕구를 뜻합니다. 진솔 지휘자의 사례는 이 '자율성'이 얼마나 강력한 동기가 될 수 있는지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는 '불러주는 곳이 없다'는 외적 제약 속에서도 자신의 음악적 열망을 외부의 승인에 맡기지 않고, '에라 모르겠다'는 결단으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배짱'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열망을 따르기로 한 깊은 자기 결정의 순간입니다. 이처럼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할 때, 우리는 진정한 '유능감'을 느끼게 됩니다. 10년간 말러라는 거대한 산을 오르며 그는 음악가로서의 유능감을 넘어, 삶의 주체로서의 유능감을 단단히 쌓았을 것입니다.
물론, 그의 길은 순탄치 않았을 것입니다. 특히 클래식 음악계에서 '여성'이자 '젊은' 지휘자라는 점은 많은 편견과 '사회적 비교'의 시선에 놓였을 수 있습니다. 심리학자 페스팅거(Festinger)의 사회비교이론은 우리가 자신을 평가하기 위해 타인과 비교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진솔 지휘자 역시 기성 지휘자나 남성 지휘자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외부의 시선, 혹은 스스로의 내적 기준과 씨름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하향 비교' (자신을 낮춰보는 비교)나 '상향 비교' (이상적인 타인과 비교하며 좌절하는 비교)에 갇히지 않고, '나만의 무대'라는 자신만의 내적 기준을 세웠습니다. 타인의 잣대가 아닌, 자신의 음악적 열망과 성장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이는 건강한 '완벽주의'와도 연결됩니다. 말러 교향곡을 10년간 완주하는 것은 타협 없는 헌신과 노력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그의 완벽주의는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예술적 비전을 실현하고 유능감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아마도 수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었겠지만, 그 모든 것이 스스로 선택한 '내 무대'였기에 버텨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필자는 종종 상담실에서 '나답게 살고 싶다'는 이들의 고백을 듣습니다. 하지만 그 '나다움'이 무엇인지, 어떻게 찾아야 할지 막막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솔 지휘자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나답게' 사는 것은 외부의 무대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스스로 '무대'를 만들고, 그 위에 자신의 열망과 노력을 채워나가는 과정일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 각자의 삶에도 '불러주는 곳 없는' 순간들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때, '에라 모르겠다'는 용기 있는 외침과 함께 나만의 무대를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 무대가 작을지라도, 그 안에서 우리는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자율성'과 '유능감'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10년 뒤,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요. 필자 역시 오늘도 나만의 무대 위에서 어떤 음을 지휘할지 고민합니다.
스스로 만든 무대 위에서, 우리 삶의 지휘봉을 잡는 용기를 가져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