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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심리학자가 바라보는 오늘의 뉴스

2026년 10월 14일 수요일
발행 2026-10-13
한겨레 사회

골목의 기억, 나의 '정체성'을 짓다

골목의 기억, 나의 '정체성'을 짓다
뛰놀던 골목·학교앞 문방구…기억 사라질까, ‘서울 수집’하는 사람들'이라는 기사를 접했습니다. 서울의 낡은 골목과 문방구 등, 사라져가는 도시의 흔적을 기록하고 보존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고 합니다. 필자는 이 소식을 접하며, 어쩌면 우리 모두가 잃어버린 '나'를 찾아 헤매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습니다. 우리는 왜 사라지는 것들에 이토록 애착을 느끼는 걸까요? 아마도 그것은 그 공간들이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조각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심리학에서 '정체성'이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이자, 자신을 다른 사람과 구별 짓는 고유한 특성과 지속성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정체성은 한 개인의 내부적 심리 구조뿐만 아니라, 외부 환경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끊임없이 형성되고 변화합니다. 에릭 에릭슨(Erik Erikson)은 인간 발달 단계를 설명하며 '자아 정체성(ego identity)'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청소년기에 '정체성 혼란(identity confusion)'을 겪으며 자신을 확립해나간다고 보았죠. 하지만 필자는 이러한 정체성 형성이 특정 시기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 삶의 전반에 걸쳐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우리가 살아온 공간, 그 속에서의 경험들이 바로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조각이 됩니다. 우리는 어떤 공간에 특별한 감정을 부여하고 정신적으로 매달리는 '애착'을 형성합니다. 이는 물리적 대상이 아니라, 그 공간에서 겪은 경험과 감정, 관계들이 만들어낸 심리적 유대입니다. 어린 시절, 필자가 살던 동네에는 좁은 골목길을 따라 작은 슈퍼마켓과 만화방이 줄지어 있었습니다. 그곳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친구들과 비밀을 나누고 꿈을 키우던 '놀이터'이자 '안식처'였습니다. 지금은 고층 빌딩과 프랜차이즈 상점으로 변해버린 그 거리를 지날 때면, 문득 낯선 풍경 앞에서 '내가 이곳에 살았던 게 맞나?' 하는 기묘한 감각에 휩싸이곤 합니다. 마치 내가 경험했던 과거가 통째로 지워진 듯한 느낌이랄까요. 서울을 수집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사라져가는 도시 풍경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 일부를 지키려는 노력을 하는 듯 보입니다. 그들에게 '옛 골목'은 단순한 길이 아니라, 그들의 어린 시절, 성장 과정, 그리고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리게 하는 강력한 '자기대상'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은 과연 의미가 있는 걸까요? 필자는 분명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시의 변화는 거대한 흐름이라, 개인이 막아서기엔 역부족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서울 수집가'들은 그 거대한 흐름 속에서도 작은 노력을 통해 무언가를 '지켜낼 수 있다'는 믿음, 즉 '자기효능감'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자기효능감'이란 특정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개인의 믿음을 의미합니다. 알버트 반두라(Albert Bandura)가 제시한 이 개념에 따르면, 우리는 높은 '자기효능감'을 가질 때 어려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목표를 향해 나아갈 동기를 얻습니다. 단순히 과거를 애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사진을 찍고, 자료를 모으고, 이야기를 기록하며 능동적으로 개입하는 것이죠. 이러한 적극적인 행위 자체가 우리 내면의 '자기효능감'을 강화하는 촉매가 됩니다. 필자의 어린 시절, 동네 놀이터의 낡은 그네가 철거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친구들과 함께 작은 현수막을 만들어 붙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그네는 철거되었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는 경험은 훗날 어떤 어려운 일에 부딪혔을 때 '그래도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어'라는 작은 용기로 남았습니다. 이처럼 거대한 변화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기보다, 작은 실천이라도 시도하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는 동시에, '자기효능감'을 높이는 소중한 경험이 됩니다. 사라지는 풍경을 마주할 때, 우리는 과거의 나를 잃어버리는 듯한 상실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상실감을 통해 현재의 내가 무엇을 소중히 여기고 어떤 '정체성'을 지켜나가고 싶은지 깨닫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 주변의 작은 변화에 귀 기울여보고, 그 안에서 나의 '정체성'과 '자기효능감'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것이 곧 우리 삶의 '회복탄력성'을 키우는 중요한 발걸음이 될 것입니다.
지나간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현재의 나를 단단하게 만듭니다.